주인이 오랫동안 집 비운 애완견 날뛰고 물어뜯고 배설
천적을 만난 북중미의 뿔도마뱀 피눈물 쏟은뒤 줄행랑
먹이 먹다가 강자 만난 갈매기들 갑자기 못먹는 풀 쪼아
온 집 안이 폭탄을 맞은 듯하다. 당신이 가장 아끼는 화장품이 모조리 바닥에 떨어졌고 옷가지와 이불은 넝마가 돼 방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나무로 된 방문은 무수한 이빨 자국으로 너덜너덜하다. 넉넉하게 준비해 둔 먹이는 하나도 먹지 않았다. 배변 훈련이 잘돼 있는 녀석이건만 침대 위에 오줌까지 쌌다.
방 한가운데 보란 듯이 앉아 있는 당신의 반려견. 1박 2일의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당신을 멘붕 상태로 만들어 놓고는 태연하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 당신은 고민에 빠진다. ‘저걸 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반려견을 혼내기 전에 이것만은 알아두길. 사실 당신보다 더 심한 멘붕에 시달린 건 하루 넘게 혼자 집을 지킨 반려견이다.
동물의 멘붕도 불안에서 출발한다.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영국의 동물행동 연구가인 그웬 베일리는 “개는 집에 혼자 남으면 외로워하거나 겁을 먹는다”고 설명한다. 주인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면 반려견은 당장이라도 악당들이 집으로 쳐들어와 자기를 괴롭힐 것처럼 심란해한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멘붕에 빠진 개는 날뛰기 시작한다. 문 모서리를 물어뜯거나 문 아래 틈새를 정신없이 파헤친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주인에게 가려는 시도다. 그러다 상태가 심각해지면 배변 욕구를 참지 못하고 방 아무 곳에나 실례를 하기도 한다. 수의학에서는 이런 증상을 ‘분리 불안 증후군’이라고 한다.
동물의 멘붕은 생존 본능과 연결돼 있다. 주로 북중미에 서식하는 뿔도마뱀은 포식자를 만나면 ‘피눈물’을 쏟는다. 죽음을 앞두고 나오는 원통한 눈물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뿌리는 ‘공격형 눈물’이다. 위기를 만나 극도로 흥분한 뿔도마뱀은 눈꺼풀 위쪽의 실핏줄을 터뜨려 피눈물을 뿜어낸다. 이 핏물은 최고 1.5m 거리까지 물총처럼 뻗어나간다. 기습을 당한 적은 놀라서 주춤하고, 뿔도마뱀은 이 틈에 유유히 위기에서 탈출한다.
모든 동물이 뿔도마뱀처럼 효과적으로 멘붕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맥락 없이 황당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박시룡 한국교원대 생물교육과 교수는 “강한 적과 싸울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 되면 몇몇 동물은 혼란에 빠져 황당한 행동을 한다”고 말했다.
찌르레기는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깃털을 고른다. 어떤 새들은 서열이 높은 새 앞에서 고개를 파묻고 잠든 척을 한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이유 없이 머리를 긁적이거나 손톱을 물어뜯는 것도 같은 이치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아무 상관도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강한 개체에게 위협을 받으면 약자에게 화풀이를 하는 동물도 있다. 갈매기는 먹이를 먹다가 서열이 높은 개체가 나타나면 갑자기 아무 상관도 없는 풀뿌리를 맹렬하게 쪼아댄다. 자기보다 강한 적을 공격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먹이를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애먼 대상에게 화를 푸는 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인간과 정말 닮지 않았나.
멘붕을 견디다 못해 기절하거나 죽어버리는 동물도 있다. ‘기절하는 염소’는 멘붕을 일으키면 쓰러져버린다. 일종의 선천성 근긴장증(몸에 힘을 주면 근육이 굳는 증상) 때문인데, 지나치게 놀라면 10초 정도 몸이 굳는다. 속이 좁은 사람을 뜻하는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속담으로 유명한 밴댕이는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하다. 이 물고기는 그물에 낚이면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다 금세 죽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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