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관악산 기슭 난곡(현 서울 관악구 난향동)은 서민 인생의 종착지 같았다. 사람들은 시에서 마련해 준 26.4m²(약 8평)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대문을 달고 마당을 닦고 방 두어 칸을 내고 부엌을 지어 살았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그런 집들이 바글거리는 달동네. 그곳의 좁은 골목을 소년은 등짐을 지고 걸었다. 까무잡잡하고 작은 초등학교 6학년생 머리 위로 솟은 검은 연탄 더미. 한 호흡에 한 걸음씩, 자연히 황소걸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짊어진 연탄을 주문한 집 부엌 한편에 내려놔야 일은 끝났다. 40여 년 전, 차동엽(57·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의 등에 얹힌 것은 연탄만이 아니었다. 훗날 그를 정신적으로 단단하게 만들어 준 힘이 같이 실려 있었다. 》 ○ 연탄 배달이라는 십자가
차동엽 신부는 크지 않다. 키가 한창 클 나이에 연탄 지게가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경기 화성, 서해 바닷가 염전이 늘어섰던 마을에서 난곡으로 올라온 그의 집은 연탄 장사를 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작된 그의 연탄 배달은 6학년이 되면서 본격화됐다. 큰형이 군에 가고, 둘째 형은 권투를 하겠다며 밖으로 나돌자 그밖에 손이 비지 않았다. 따로 일꾼을 둘 형편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다리는 건 배달해야 할 연탄 수백 장. 등에 지고 손에 들고 묵묵히 비탈을 오르내리다 보면 해가 저물었다. 당시 난곡 버스정류장에는 성인 지게꾼들이 있었다. 승객들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삯을 받는 그들의 하루치 일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노동이 열세 살 남자 아이의 몫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부모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연탄 배달을 하는 그 앞에 조그마한 전단지가 떨어져 있었다. 산수 전문 참고서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산수를 잘하고 재미있어 하던 그는 눈이 동그래져 냉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돌아와 그 종이를 보이며 사 달라고 했지만 어머니의 대답은 “안 돼”였다. ‘하나 사주면 어디 덧나나.’ 마음속으로 한마디 한 게 그가 한 저항의 전부였다.
“지금 돌이켜 보니까 (우리 부모님이) 해도 너무했다고. 일은 그렇게 부려먹고 말이지요. 그래도 그때 불평 하나 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원망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가요.”
희한하게도 공부는 잘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 듣는 게 그가 하는 공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거친 일을 하면서도 삐딱하게 굴지 않았다. 반듯하고 조신했다.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면 돈을 꽤 번다더라”며 같이 가출하자는 친구들의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10분 정도 고민하고는 접었다. 학교 가는 게 훨씬 재미있어서였다. 어머니들은 “동엽이 좀 봐라. 쟤는 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지 않느냐”며 자신의 아이들을 닦달하곤 했다. 그의 한 초등학교 친구는 최근 그에게 편지를 보내 ‘그때 너 좀 본받으라며 어머니한테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뜻밖에도 그는 다시 태어나면 다시는 연탄짐을 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어렸을 적 연탄 배달의 후유증이 그의 몸에 고난의 십자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성장기에 짊어진 연탄은 그의 척추를 오그라뜨렸다. 이른바 척추협착증. 그 때문에 간에 이상이 생겨 피로가 쉽게 오고 면역력이 약해져 간염에 걸리기도 쉽다.
하지만 연탄 배달이라는 황소걸음이 그의 정신에 새긴 내공(內功)은 그로 하여금 그보다 더한 십자가도 거뜬히 짊어지게 했다.
○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다
그의 부모는 대를 이은 가톨릭 가문 출신이었다. 서해 염전마을에 살 때 그의 집은 공소(公所·천주교에서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그 구역) 역할을 했다. 본당에서 1년에 두어 번 신부가 오면 그의 집에 머무르며 미사를 봤다. 그는 그곳에서 영세를 받았다. 온 식구가 서울에 올라와 어렵게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천주교를 믿지만 성당에는 나가지 못하는 ‘생존형 냉담자’가 됐을 뿐이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유신 말기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그는 학년을 더해 갈수록 전공(기계설계)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 사회에 나가 돈을 버는 것까지의 의미는 알 수 있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매 학기 평균 B학점 이상을 받아야 모교(유한공고)에서 주는 전액장학금이 끊기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 기말시험 공부는 했지만 조금씩 전공과 거리를 두게 됐다.
“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어요. 한평생 이런 문제의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됐지요.”
1980년 5월 17일 전국비상계엄령과 함께 모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때 서울 정릉의 한 수녀원에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쓴 서강대 서인석 교수의 성경 예언서 강의가 있었다. 그 책은 당시 대학가에서 종교성을 띤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 서 교수의 강의를 5일간 들은 대학 4학년 그의 가슴에 ‘사제의 길’이 슬며시, 그러나 아주 뜨겁게 비집고 들어왔다. “그 후 그 길밖에 안 보였어요.” 문제는 결단이었다. 결단까지는 2년이 더 필요했다.
1982년 8월, 그는 방문을 잠그고 기도를 마친 뒤 손에 잡히는 대로 성경을 펼쳤다. 루카복음(누가복음) 19장.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대목에 눈이 가서 멈췄다.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비극을 안타까워하는 예수의 마음이 시대 상황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에 그대로 와 닿았다. 눈물과 콧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때 그는 사제(司祭)가 되기로 최종 결정했다.
“자신이 없었어요. 내가 사제의 직을 선택해서 가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없었어요. 신(神)이 불러주셔야 신이 나는 거지, 나 혼자 간다고 해서 신이 나겠나. 그래서 홀로 기도를 했던 거지요.”
꼭 닫힌 방에서 홀로 기도를 하며 절대자의 응답을 간절히 바란 적은 그 뒤로 한 번 더 있었다. 제대를 하고 신학교에 편입해 학사 과정을 마친 뒤 오스트리아로 유학 가서 6개월째 됐을 때였다. 갑자기 변비가 5일간 지속되며 극심한 불면증과 스트레스에 정서장애까지 왔다. 절망이었다. 한국행 보따리를 쌌다. 한국에서 온 한 신부가 그에게 하루라도 더 고민해 보라고 만류했다. 그는 “하느님, 단 하루만입니다” 하고는 기숙사 방에서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결과는? 그는 이튿날 정상적으로 배변을 봤고 수년 뒤 신학박사 학위를 땄다.
“제 배 속이 갑자기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미친 듯이 웃다가 울다가 고꾸라져 잠에 빠져들었어요.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 예수님도 약장수였다
차 신부는 인천교구에 속한 가톨릭 신부다. 2003년까지는 교구 내 몇 개 본당의 주임신부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생 해설가’라는 호칭의 대중강연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희망차게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원리를 설명한 책 ‘무지개 원리’는 100만 부 이상 팔렸고, 뒤 이은 ‘바보 Zone’도 10만 부 넘게 나갔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자는 취지의 대중 강연을 전국 각지에서 연 600회 정도 한다.
한 신문기자가 그런 그에게 말했다. “저는 신부님을 보면 떠돌이 약장수가 떠오릅니다.” 차 신부가 답했다. “예수님이 약장수였어요. 저잣거리를 다니고 밑바닥 인생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그들하고 어울리면서 (유대의 율법가나 권세 부리던 자들에게) 먹었던 욕이 약장수였습니다. 스승이 들은 소리를 (내가) 들으니 영광입니다.”
그는 본당을 맡아 신도들을 인도하는 일과 대중을 직접 대면하는 일 사이에 어떤 괴리도 없다고 확신한다. 1988년 오스트리아 빈대학에 입학해 후일 지도교수가 되는 줄 레노 박사의 신학강의 첫 시간에서였다. 레노 박사는 칠판에 ‘사목(司牧)이란?’이라고 쓰고는 뒤이어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고 적었다. 절망, 상처,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에게 드리운 각종 ‘죽음’을 치유하고 어루만지는 일이 사제가 할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때 생각했지요. ‘저게 전부다.’ 나머지는 각론인 거였어요. 지금도 제가 그 말 덕분에 교회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지 만날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는 사제가 됐습니다.” 그에게 사제의 길이란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 속으로 더 잘 들어가기 위해 사제를 택했다. 그 길에서 그는 편안해 보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