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주면 학생부 빨간줄” 학교폭력 자해공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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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30일 03시 00분


일부러 괴롭혀 폭력 유도 “대학 못가게 만든다” 위협… 합의금으로 1000만원 요구
일진들이 맞는 장면 찍어 3명에 200만원씩 뜯기도… 행정심판 제기 올들어 56건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느린 A 군은 고교 1학년 때부터 B 군에게 놀림을 당했다. 2학년인 올해, 다른 반이 된 B 군이 쉬는 시간에 찾아와 욕을 했다. 여름방학을 며칠 앞두고 참다못한 A 군은 B 군의 어깨를 밀었다. 뒤로 넘어진 B 군은 다음 날 부모와 함께 A 군 어머니의 직장으로 찾아왔다. B 군의 부모는 ‘2주 정도 안정을 요하는 가벼운 뇌진탕’이라는 진단서를 내밀며 1000만 원을 요구했다.

터무니없는 액수에 놀란 A 군 어머니에게 B 군 어머니는 “학교폭력 가해자로 빨간 줄을 남기겠다. 평생 대학에 못 가게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A 군 어머니는 결근과 조퇴를 거듭하며 3주 동안 매일 B 군 집에 찾아가 통사정을 한 끝에 700만 원에 합의를 봤다.

나중에 알아 보니 B 군은 1학기에도 다른 중학생에게 비슷한 수법으로 몇 백만 원을 받아냈다. A 군 어머니는 “돈을 뜯어내려고 계획적으로 약한 애를 괴롭힌 것 같았다. 억울하지만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을 안남기려면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학생부에 기재하게 만든 정부의 제도를 악용해 과도한 합의금을 뜯어내는 부작용이 빚어지고 있다. B 군처럼 고의로 학교폭력을 유도한 뒤 이를 학교에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받는 식이다.

경기도의 C중학교도 최근 이 문제로 술렁였다. C중학교의 ‘일진’들이 이웃 D중학교 학생 3명에게 시비를 걸어 싸우다가 자신들이 맞은 장면만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화면에 맞은 듯이 나온 2명은 학교에 신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때린 학생 3명에게 1인당 200만 원씩을 요구했다.

때린 학생 중 한 명이 외국어고 입시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일진 학생의 아버지는 합의금을 더 많이 요구하고 나섰다. D중학교 교사는 “학생부에 기록이 남으면 애들 신세를 망친다고 난리라서 학교폭력자치위원회도 못 열고 있다. 어쩌다 자해공갈단 수준의 황당한 일에 말려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학생부에 가해자로 기록되지 않도록 행정심판을 제기하는 학부모도 늘고 있다. 행정심판은 행정기관의 처분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관할 기관에 이의를 신청하는 절차. 일선 학교가 내린 학교폭력 관련 징계에 대해서는 학교장을 상대로 시도교육청에 행정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학교폭력 관련 행정심판은 2009, 2010년에는 한 건도 없었고 2011년에는 단 한 건이 제기됐다. 올해는 1∼9월에 서울시교육청 18건을 포함해 모두 56건이나 된다. 시도교육청 산하 행정심판위원회가 신청을 받아들이면 학교의 징계 처분은 효력을 잃는다. 학생부에 기록을 남는 일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이야기다.

경기도 E고에서는 학교폭력을 이유로 등교정지 처분을 내리자 가해 학생과 부모가 교장을 상대로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학교폭력 사실을 학생부에 기재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현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며 “학교장을 위한 법률 지원이 필요한 지경”이라고 전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행정심판 한 건을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인력이 만만치 않은데 2학기 들어 행정소송이 더 늘어나는 추세라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학교폭력#학생부 기재#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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