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로 보이는 백인 학생들이 제 주변을 계속 어슬렁거렸는데 평범한 인상이어서 그러려니 했죠. 근데 그렇게 돌변할 줄은….”
11월 29일 호주 멜버른 박스힐의 한 공원에서 만난 한국인 유학생 장모 씨(33)는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하면서도 그날의 충격에 땀이 배는 듯 손을 연신 바지에 닦았다. 개방된 곳에 있으면 두려움이 급습하는 정신적 후유증 때문에 손바닥에 계속 땀이 고여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이제 장 씨의 왼손 새끼손가락은 부기가 많이 빠져 있었지만 왼쪽 팔뚝에는 여전히 수십 바늘을 꿰맨 자국이 선명했다. 두 달 전 바로 이 공원에서 벌어진 사건이 남긴 상처였다.
○ ‘fucking Chinese’라며 달려들어
장 씨는 9월 27일 오후 6시 반경 한국인 친구 김모 씨와 공원 안 벤치에 설치된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가족 나들이객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오가는 평온한 분위기였다. 백인 10대 청소년 10여 명이 장 씨 일행 주변을 2시간가량 맴돌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상 조짐이 감지된 건 한 백인 여학생이 장 씨 일행에게 다가와 “담배를 달라”라고 말하면서부터. 두 사람 모두 담배를 피우지 않아 “담배가 없다”라고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두 사람을 둘러싼 뒤 “fucking Chinese(망할 놈의 중국인)” 등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들 중 한 명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보이며 “money, money”라고 돈을 요구했다.
장 씨는 “11∼15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었고 덩치가 크지 않아 크게 위험하게 느끼지는 못했다”라고 했다. 하지만 마주 앉아 있던 친구 김 씨가 이들에게 “가라”라고 말하자 한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김 씨의 머리를 때렸다. 그때 시간이 오후 8시 반 경. 어둑해진 때라 장 씨는 이들의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밝은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장 씨가 불이 밝혀져 있는 공원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순간 등 뒤에서 예리한 흉기가 손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려 하자 둔기가 왼팔을 내리쳤다. 장 씨는 팔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화장실을 향해 계속 걸었지만 이들이 연이어 내려친 둔기에 머리를 맞고 기절했다. 장 씨는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화장실 앞에 쓰러졌다.
김 씨는 장 씨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차릴 틈도 없었다. 김 씨가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내자 이들은 둔기로 김 씨의 손을 내리쳤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뒤늦게 장 씨를 발견한 김 씨가 장 씨를 향해 달려가는 걸 보고 가해 청소년들은 낄낄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장 씨는 주변 시민의 도움을 받아 병원 응급실로 가까스로 옮겼다.
○ “피습 뒤 정신과 치료 중”
장 씨는 왼손 새끼손가락이 절단되고 왼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담당 의사는 “뼈를 포함해 새끼손가락에 있는 3개의 신경 중 2개가 절단됐으며 단번에 이 정도 상처를 낼 수 있는 칼은 특수 제작된 흉기로 보인다”라는 소견을 냈다. 다행히 접합수술을 해 손가락은 붙였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장 씨는 “호주에 오기 전 디자인회사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하필 내가 왼손잡이라 계속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현재로선 완치 여부를 알 수 없고 재수술이 필요하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7월 회사를 관두고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단기 유학 비자로 호주 멜버른에 와 기술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는 학교 측이 소개해 준 현지 피해자보호단체에서 치료비를 일부 지원받고 있지만 병원비를 대느라 한국에서 직장생활하며 모은 돈을 다 써 버렸다고 했다.
“몸도 다치고 물질적 피해도 크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가장 심각한 것 같아요. 제 새끼손가락 상처 때문에 그런지 뼈 절단면이 보이는 정육점 주변만 가도 소름이 끼칩니다. 이곳 사람들이 무서워서 혼자선 외출할 엄두도 못 내요.”
장 씨는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걱정을 끼칠까 봐 아직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그는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호주에 왔는데 사고 이후 병원을 다니고 변호사를 만나느라 영어 공부할 시간도 없고 생활이 완전히 엉망이 돼 버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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