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을 위해서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내지르는 웅변조에 익숙해 있던 당원들에게 특유의 담담하고 단호한 연설은 낯설었다. 2004년 3월 23일 한나라당 임시전당대회가 열린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 차떼기당과 탄핵 역풍으로 참패가 불 보듯 뻔했던 17대 총선을 20여 일 앞두고 새 대표를 뽑는 자리였다. 단상에는 1998년 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한 ‘1.5선’의 박근혜 의원이 섰다.
구원투수로 나선 박 당선인은 천막당사, 눈물을 훔치는 TV 연설 등으로 등 돌린 민심을 돌려세우는 데 성공했다. 예상치 못한 121석의 선전. 대선주자의 입지를 다진 첫 번째 사건이었다.
○ 위기가 불러낸 ‘선거의 여왕’
18대 대선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12월 19일, 박 당선인은 다시 “저는 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비상대책위원장 수락연설에서였다. 탄핵정국 때보다 자신에겐 더 위험한 선택이었다. 19대 총선 결과가 나쁘면 5년 가까이 별러온 대선 도전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주변에선 ‘독배’라며 말렸다. 박 당선인의 고민도 깊었다. ‘좌초 위기의 한나라당호 선장이 될 것인가, 훗날을 기약하며 몸을 낮출 것인가.’ 결론은 2004년과 같았다. “내 한 몸 사리자고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박 당선인은 비대위원장을 맡아 외부 비대위원들과 함께 당 정강정책을 전면 손질하고 당명 개정을 이뤄냈다. 단독 선대위원장으로 152석의 승리를 거뒀다.
앞서 2년 3개월의 야당 대표 시절 흉기 테러를 겪으며 치른 2006년 지방선거를 비롯해 다섯 차례의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40 대 0’의 완승. ‘선거의 여왕’이란 별칭이 따라다녔다. 그러고 자신의 선거인 18대 대선을 승리로 장식하며 정점을 찍었다.
잊혀진 대통령의 딸이 ‘정치인 박근혜’로 세상에 나온 것도 사실 위기가 계기였다. 박 당선인은 1997년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흔들리자 “아찔함으로 등허리가 서늘했다”는 것.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 탓으로 돌리는 소리엔 울분도 일었다고 한다. 그는 15대 대선을 8일 앞둔 그해 12월 8일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됐을 때는 “22세에 어머니를 총탄에 잃고 27세에 아버지마저 잃은 뒤 겪은 고통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고 한다.
○ 여성 야당 대표, 여성 대통령
2000년 5월 31일 박 당선인은 부총재로 한나라당 지도부에 입성했다. 지명직 여성 부총재 자리를 뿌리치고 경선에 출마해 얻은 결과였다. 그는 “‘여성 정치인’으로 보호받고 특혜를 누리며 여성 몫으로 만들어놓은 자리에 임명되는 것은 내 정치적 신념과도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성 몫의 자리가 오히려 구색 맞추기식 굴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는 종종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여성이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고 있다”고 말해왔지만 사실 자신이 ‘여성’ 정치인으로 부각되는 모습은 꺼렸다. 그럼에도 17대 대선 경선에선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을 기점으로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지지율을 역전당한 뒤 반전의 계기를 잡지 못했다. 안보 변수에서 여성이란 점이 마이너스가 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18대 대선 출마를 선언한 7월 10일만 해도 박 당선인은 ‘여성 리더십의 강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여성…”하며 말을 잠시 멈췄다가 “리더십이라는 게 여성이고 남성이고 간에 신뢰가 중요하고, 맡은 일에 책임감 느끼고 이뤄지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대선전이 본격화되자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메인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유세 때마다 “지금은 어머니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선대위 일각에선 ‘여성 대통령론’을 전면에 내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세상을 바꾸는 약속’ 등 다른 슬로건을 같이 키우자는 제안도 있었다. 한 측근은 “박 당선인 스스로 국민의 삶을 잘 살피는 부드러운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 집권을 향한 5년의 프로젝트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합니다.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읍시다.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이 걸려서라도 잊읍시다. 그리고 다시 열정으로 채워진 마음으로 돌아와 나를 도와줬던 그 순수한 마음으로 정권 창출을 위해 함께 힘을 모읍시다.”
2007년 8월 20일 1.5%포인트 차이로 석패했지만 그는 담담하게 패배 후보 연설을 읽고 당선된 이명박 후보를 축하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물었던 ‘아름다운 승복’은 내내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 이듬해 18대 총선 직후 박 당선인은 경선 캠프에 참여했던 이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저는 반드시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대선 프로젝트도 다시 추진됐다. 박 당선인은 우선 중도로의 확장을 꾀했다. 2005년 12월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되자 53일 동안 장외투쟁을 하는 등 노무현 정부 시절 ‘4대 입법’ 철회에 앞장서며 강성 보수 이미지에 갇혀 있던 그였다.
2009년 5월 7일 미국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그는 ‘박근혜식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인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천명했다. “정부는 시장경제 작동 과정에서 문제가 될 소지를 방지하고, 소외된 경제적 약자를 확실히 보듬어야 한다”고 밝혔다. 2007년 ‘근혜노믹스’의 상징인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고)’와 ‘작은 정부’는 사실상 폐기했다.
‘약속의 정치인’이라는 브랜드 굳히기도 본격화했다. 의정생활 시작 뒤 처음으로 2010년 6월 29일 국회 본회의 단상에 섰다. 세종시 수정법안의 본회의 찬반표결을 앞두고 반대토론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치가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깨진다면 끝없는 뒤집기와 분열이 반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당선인은 이명박 정권 출범 후 국정 현안에 대한 의견 피력을 자제해왔다. 현 정권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세종시만큼은 오히려 원안에 ‘플러스 알파’를 해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이는 4·11총선 때 충청지역에서 새누리당이 압승을 거두고, ‘여당 속 야당’의 이미지를 강화시켜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하는 발판이 됐다.
시대적 과제로 삼은 국민대통합 준비 작업에도 공을 들였다. 2004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으로 시작한 동서화합의 화두는 2009년부터 여러 통로로 동교동계, 옛 민주계 인사들과 물밑 교감을 하며 구체화됐다. ‘동교동 프로젝트’는 6일 김 전 대통령의 가신 출신으로 ‘리틀 DJ’로 불린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의 지지 선언으로 마무리됐다.
○ ‘양날의 칼’인 정치적 자산
18대 대선을 9시간 반 앞둔 18일 밤 서울 광화문광장. 그는 마지막 유세에 나서 말했다. “저는 돌봐야 할 가족도,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습니다. 저에게는 오로지 국민 여러분이 가족이고, 국민 행복만이 제가 정치를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정치인생 15년 동안 가장 절박한 세 번의 순간에서 그는 ‘전략’보다 진정성에 호소하는 방식을 택했다.
박 당선인은 자서전에서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아버지, 어머니를 기억하는 분들은 부모님을 불행하게 잃은 내게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드시는 모양”이라고 썼다. 9월 역사인식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그의 지지율 하락세는 40%대 초반에서 멈췄다. ‘박정희, 육영수 향수’를 가진 50대 이상 세대에서의 지지가 워낙 견고해서였다.
원칙과 신뢰의 리더십, 장·노년층의 확고한 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불통과 고집, 2030세대와의 소원함으로 이어진다. 1577만3128표의 최다득표 대통령, 득표율 51.6%의 첫 과반 득표 대통령. 박 당선인의 정치적 자산은 그가 헤쳐 나가야 할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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