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 1일, ‘성우’ 장광(60)은 결혼식장에 있었다. 식장 입구에는 ‘신랑 장광’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식장에 직장 동료가 없었다. 하필 이날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동아방송 직원들이 KBS로 이사 가는 날. 1978년 동아방송 공채로 입사한 그는 동료들의 축하 속에 식을 치르고 싶었지만 썰렁한 식장에 속이 상했다. 그는 신혼여행을 미루고 다음 날 새 직장으로 출근했다. 결혼식을 망친 ‘그 사람’이 미웠다.
“인연이란 게 참 묘해요. 제가 그분 역할을 할지 누가 알았겠어요.” 최근 서울 강남구 카페에서 마주 앉은 장광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 사람’은 영화 ‘26년’에서 장광이 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그린 역할이다.
세간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하는 역할. 가족이 말리지는 않았을까. “딸이 그러더군요. ‘사람들은 얼마나 비슷하게 그려낼까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요. 그래서 디테일을 파고들었어요.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인토네이션(억양)이 있는 말투, 다물고 있을 때 ‘역(逆)U’자형이 되는 입 등이 그분의 특징이죠.” 그의 딸은 개그우먼인 장윤희다. 부인 진성애 씨도 탤런트다.
그에게 전 전 대통령 역이 처음은 아니다. 1998년 SBS드라마 ‘삼김시대(三金時代)’에도 머리가 벗어진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캐스팅됐다. 하지만 드라마는 저조한 시청률 때문에 조기 종영됐다. “외모는 ‘싱크로율’이 꽤 높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그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어요. 당시 서슬 퍼렇던 5공화국의 분위기를 응축한 그분의 카리스마 말이죠.”
영화의 마지막 부분 ‘그 사람’은 집에 난입한 조직폭력배 진배(진구)에게 주먹으로 맞는다. 장광은 촬영 중 실제 맞지는 않았지만 저절로 ‘억’ 소리가 나왔다. “조근현 감독이 3번을 더 찍자고 했어요. ‘그분은 이런 상황에서도 속으로 삭이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라고 지적했죠.”
지난해 출연한 영화 ‘도가니’에서 그는 아이들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는 쌍둥이 교장 형제로 1인 2역을 해냈다. 오디션 경쟁률이 800 대 1이었다. “많이 망설였어요. 크리스천(기독교인)인데 ‘교회에서 아는 사람이 보면 뭐라고 할까’ 걱정됐어요. 누군가 해야 할 역이라면 잘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도가니법’ 입법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이 생겼어요.”
성우 시절 더빙 영화에서 그는 제라르 드파르디외, 게리 올드먼 목소리 연기를 도맡아 했다. TV 외화시리즈 ‘V’의 윌리엄, 만화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깡통 로봇도 그의 목소리였다. 연극영화과(동국대)를 나와 원래 꿈은 연극배우였다. “영화 연기가 가장 어려워요.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스크린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섬세한 심리 묘사, 디테일한 연기를 못하면 견뎌낼 수가 없어요.”
‘도가니’로 시작한 늦깎이 배우 생활은 올해 꽃을 피웠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내가 살인범이다’ ‘음치클리닉’ 등 4편이나 출연했다. 최민식 황정민과 찍은 ‘신세계’, 김수현과 함께 출연한 ‘은밀하게 위대하게’도 내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지하철 타기가 힘들어요. 등산 가면 ‘각하 오셨어요’라고도 하고요. 늦게 시작한 배우 생활, 초심을 잃지 않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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