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아버지의 자랑이자 마을의 자랑이었다. 강원 원주시 귀래면 귀래리.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서울 명문대에 합격했다. 그런데 지금은 골치를 썩인다. 열 번째 학기를 등록했는데, 이번 학기에도 졸업을 못할 수 있다고 했다. 요즘 아들은 눈빛도 변했다.
동건이도 알고 있다. 대학 3학년 때 포스코 입사를 전제로 장학금을 받는 ‘포스코 장학생’이 됐을 때 식당을 하는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그날 손님 모두에게 소주 한 병씩을 돌렸다. 플래카드도 내걸었다. ‘경축 이동건 포항제철 합격.’ 아버지는 “포스코라고 쓰면 마을 어르신들이 몰라본다”며 웃었다.
#백민서
평생 모난 데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가족은 걱정부터 앞섰다. 고려대 경영대를 나왔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석사 학위도 받은 수재 중의 수재가 갑자기 웬 사업?
민서 자신도 사업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처음엔 그저 대학 동기인 동건의 일을 도와주면서 경험을 쌓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번 손을 대자 모든 게 변했다. ‘내 일’을 한다는 건 짜릿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건 경제 공부였는데 ‘취업이 잘된다’고 주위에서 말하기에 경영대에 갔다. 즐거운 일을 하고 싶었는데 ‘외국 경험을 쌓으면 좋다’고 해서 옥스퍼드대에 갔고 졸업할 즈음 주프랑스 파나마대사관에 취직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과연 뭘까.
#나의 진짜 여행
사람들은 늘 여행을 인생에 비유한다. 낯선 이들을 만나고, 몰랐던 세계를 배우며, 등에 짊어지고 걸을 수 있는 진짜 필요한 것만 남기는 과정. 인생과 여행은 똑같았다. 동건과 민서는 모두 여행광이었다. 미지의 장소,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가보지 않은 길 앞에 놓인 모험에 그들은 열광했다.
그래서 회사를 차렸다. 이름은 ‘마이리얼트립(My Real Trip)’. 다른 여행사와는 전혀 다른 여행 경험을 팔았다. 영남대 학생이 안내해 대구 중심가의 오래된 골목길을 걷는 ‘대구 근대 골목 투어’, 서촌(서울 경복궁 서편 통인동 인근 한옥마을)을 사랑하는 서촌소식지 편집장과 돌아보는 ‘서촌 투어’, 독일에서 환경정책을 공부하는 유학생이 안내하는 ‘생태도시 프라이부르크 투어’, 파리 건축학도의 ‘파리 스쿠터 투어’ 등이 이 회사의 여행상품이다.
전문 여행 가이드를 고용하는 대신 평범한 지역 토박이들을 가이드로 끌어들였다. “남들이 모르는 재밌는 곳을 알고 있나요?” 마이리얼트립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가이드가 됐다. 번잡한 패키지여행도, 여행책의 내용보다 더 깊이 알기 어려운 개인여행도 아닌 ‘진짜 여행’이 가능했다.
#겨울 같은 봄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게 쉽게 풀린 건 아니었다. 시작은 의욕에 넘쳤다. 세 명이 함께 창업했고, 인턴 직원도 두 명을 뽑았다. 지난해 4월 처음 웹사이트를 열었을 때엔 날마다 서비스를 발전시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겠다는 꿈도 꿨다.
현실은 냉정했다. 손님다운 손님이 없었다. 간혹 찾아오는 손님은 가족과 친구들뿐이었다. 친구들은 한심하게 생각했고,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창업 멤버들도 하나둘 회사를 그만뒀고, 5월 말에는 동건과 민서 둘만 남았다.
마법처럼 모든 게 변한 건 7월부터였다. 7월 2일 프라이부르크 생태투어 상품에 공무원 세 명이 돈을 냈다. 출장을 왔다가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 몇 시간의 자유시간이 남았는데 마이리얼트립이 그 몇 시간 동안 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여행상품이었던 것이다. 첫 결제였다.
동건은 현지 가이드에게 할 말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여러 번 겪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독일로 전화를 걸었다. “마이리얼트립입니다. 저희 고객님들께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 주세요.” 속으로는 엄청 떨렸다. 감격해서 목도 메었다.
그 뒤로는 너무 바빠졌다. 이제 마이리얼트립에는 해외 여행상품만 100건이 넘고, 국내 여행상품도 10건을 넘어섰다. 후기를 쓴 소비자들의 평점은 별 다섯 개 만점에 대부분 네 개 또는 다섯 개였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무료로 사무실을 빌려줬던 고려대 창업보육센터에서는 “이제 자립할 수 있으니 후배들을 위해 사무실을 비워 달라”고 했다. 그래서 유난히 추운 올겨울, 외풍이 심해 실내에서 겉옷을 벗기 힘든 낡은 건물로 이사했다. 그래도 이들에겐 지금이 여름 같다. 단둘만 남았던 5월이 훨씬 추웠다.
#학점 DDD
얼마 전 동건에게 경사가 생겼다. 드디어 졸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졸업에 필요한 마지막 세 과목을 들었던 10학기, 학점은 D, D, D였다. 그래도 동건은 홀가분하다며 좋아했다. 사업에만 100% 전념할 수 있게 됐다며.
민서는 3년을 얘기했다. “긴 인생에서 3년을 지워 버린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어요? 해보고 싶었던 모든 걸 후회 없을 때까지 다하려고요. 그래서 실패하면 그때 남들처럼 살아도 늦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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