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수제 초콜릿 가게 ‘삐아프’에 들어서자 몇 가지 ‘없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첫째는 초콜릿 진열대의 뚜껑이었다. 쇼콜라티에(초콜릿 장인) 고은수 씨(34)는 “보관하기가 쉽진 않지만 고객들이 초콜릿의 색과 풍미를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시도해 본 것”이라고 말했다. 매장에는 테이블도 없었다. “테이블이 생기면 카페처럼 이것저것 상품 구색을 갖춰 놓아야 해요. 저는 온전히 초콜릿으로만 승부를 걸고 싶었습니다.”
대목인 밸런타인데이(2월 14일)를 앞두고 가게 안에는 활기가 넘쳤다. 고 씨가 매장 안쪽의 주방을 오가는 사이 아내 이홍실 씨(34)는 블로그에 올릴 제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세 살배기 둘째 아들은 아빠가 만든 초콜릿을 쪽쪽 빨면서 엄마 아빠 주위를 맴돌았다.
이렇게 소박하지만 달콤한 평화는 사실 도전의 대가다. 유난히 치열하게 살면서 때론 쓴 아픔을 맛보았던 고 씨는 또 다른 도전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었다.
○ 마음의 병을 얻은 수재
고 씨는 충북 충주의 명문 충주고를 수석 입학해 수석 졸업한 수재였다.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니다. 미술에도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집배원 아버지와 공장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아들의 꿈을 지원해 줄 형편이 못 됐다.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 그는 넌지시 부모님께 “미대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물었다. “미안한데, 돈이 얼마나 드냐?” 그는 존경하는 부모님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곧바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1998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다. 정확히 뭘 배우는 곳인지도 모르고 한 선택이었다. 당연히 전공이 적성에 잘 맞지 않았다. 그는 학교 수업보다는 직접 결성한 인터넷 소모임에 열정을 쏟았다.
결국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대학 3학년 때 작은 회사를 세웠다. 회사는 가족 간의 경조사를 공유하는 ‘가족 네트워크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이 돼 본 적이 없는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실제 고객들이 어떤 서비스를 원하는지 잘 몰랐다. 4학년까지 학교에 등록하긴 했지만, 학점을 못 채워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느라 빚이 2억5000만 원까지 불어났다. 그 빚의 무게만큼 마음의 병도 깊어갔다. 다행히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정보기술(IT) 기업을 창업했던 형이 그의 회사를 인수해 줬다. 그 뒤 일에만 매달린 덕에 2006년 빚을 모두 청산했다. 그러곤 충주고 수석 입학자의 지역방송 인터뷰를 지켜봤다던 아내와 결혼했다.
겉으로는 모든 게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마음의 병은 낫지 않았다. 초년에 산전수전을 다 겪느라 에너지가 소진된 것이었다. 아내에게 “모든 게 멈춰버린 것 같다”고 고백했다.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 ‘317’의 기적을 꿈꾸며
모든 것이 공허했다. 새로운 삶의 목표가 필요했다. 그러다 휴식을 위해 갔던 일본 도쿄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여행 마지막 날, 고 씨는 시간을 때우려고 들른 신주쿠 이세탄백화점에서 프랑스 초콜릿 ‘장폴에뱅’을 처음 만났다. 입안에 넣은 초콜릿 한 알은 맛의 기적을 선사했다. 그는 초콜릿이 자신의 삶을 다시 달콤하게 채워 줄 ‘구세주’임을 직감했다.
한국에서 초콜릿 제조법을 배우다가 프랑스 파리의 요리·제과학교 ‘에콜 르노트르’를 찾아갔다. 3개월 후 귀국해 당장이라도 가게를 차리고 싶었지만 아내가 만류했다. 한 조각에 2000원을 웃도는 수제 초콜릿 시장이 만들어지기엔 아직 국내 상황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 씨는 결국 IT업계로 돌아가 중국 베이징에서 6개월 동안 일했다. 그렇지만 중국에서도 초콜릿 만들기를 멈출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초콜릿 강의를 시작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유명 학원에서도 러브콜이 잇따랐다. 이를 계기로 루이뷔통 셀린 랄프로렌 마놀로블라닉 등 글로벌 유명 브랜드들의 VIP파티에 초콜릿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가 깐깐하게 만든 초콜릿 브랜드 ‘삐아프’는 장인정신을 추구하는 럭셔리 브랜드와 조합이 잘 맞았다.
2011년 12월 지금의 자리에 첫 매장을 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또 다른 도전을 감행했다. 살던 집을 전세에서 월세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감이 좋았다. 그가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썼던 삐삐번호 뒷자리는 ‘317’, 첫 창업일은 3월 17일, 아내의 생일도 3월 17일이었다. 서로를 운명이라 여겼던 부부는 매장 앞 도로에 그려진 주차번호 ‘317’을 발견하고 마주 보며 웃었다.
케이터링도 하고, 강의도 하고, 매장에서 직접 판매도 하는 고 씨는 요즘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할 정도로 바빠졌다. 그러나 큰 욕심을 내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있다. 백화점들의 입점 요청이 이어지고 있지만 백화점이 원하는 이런저런 조건을 맞추려면 스스로 타협점을 찾게 될까 봐 고사하고 있다.
도전 때문에 아팠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수백 년의 역사가 이어지는 제대로 된 초콜릿 가게를 만드는 새 꿈을 꾸게 된 것도 결국은 새로운 도전을 통해 얻은 소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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