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노벨상? 난 평생 상 노린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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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5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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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하게 황홀해요. 네 발로 기어 다니다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은 짐승처럼. 차원이 다른 세계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무중력 상태의 황홀함 같은 걸 느낍니다. 그 순간 나는 솔개예요. 저 위에 있지. 지상의 병아리를 바라보면서.”

달뜬 목소리였다. 눈빛도 반짝였다. 고은(80) 시인에게 갓 출간된 책을 받아들 때의 느낌을 물은 참이다. 그는 새로 돋은 날개를 확인시키려는 듯 두 팔을 들어 보이며 환히 웃었다. 그 순간 수년 동안 노벨문학상 최종심에 이름을 올린 여든의 시인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쁨과 설렘 속에 말간 문청 한 명이 수줍게 앉아 있는 듯했다.

# 온종일 글 쓰고 밤에 책 읽고

시인은 지난 연말 책 두 권을 한꺼번에 냈다. 1970년대 일기 모음집 ‘바람의 사상’과 대담 형식 자서전 ‘두 세기의 달빛’이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몇 번째 책인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1958년 등단 후 150여 권쯤 낸 것 같다”고 헤아릴 뿐이다. 2002년 김영사가 그의 작품을 모아 전집을 냈을 때 차곡차곡 쌓아보니 자신의 키(173cm) 정도 높이가 되더란다.

“그 후에도 계속 썼으니 이제 내 키를 훨씬 넘겠지. 그래도 이 느낌은 달라지지 않아요. 새 책이 나올 때마다 황홀하죠. 손에 들면 심장이 이렇게 막 움직이고.”

그래서 계속 쓸 수밖에 없다. 지금도 약속이 없는 날이면 온종일 글을 쓰고, 밤에는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가 1983년부터 30년째 사는 경기 안성시 자택 서재에는 각각 다른 글을 쓰는 책상이 세 개 있다. 그것을 둘러싸고 줄잡아 수천 권은 될 법한 책이 하늘을 향해 쌓아 올려지고 있다. 마치 그리스 신전의 기둥 같다는 얘기에 그는 “독서는 나의 종교 행위고, 책방은 나의 절간이자 교회”라고 말했다.

“나의 신은 세종입니다. 그는 나를 나이게끔 해준 사람이죠. 나의 문자가 없었다면, 나는 그저 중국 쓰레기였을 거예요. 세종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창조행위로 문자를 만들고, 내가 타자의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해준 겁니다. 그 앞에서 다른 신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이 종교의 경전은 사전이다. 시인은 “심할 정도로, 아주 상습적으로 사전을 본다”고 했다. 사전을 읽는 동안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그렇게 매순간 그는 깨닫고야 만다. “나는 시인밖에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이 절망이 나를 시인으로 만든다.”

이번에 펴낸 책 두 권은 그가 직접 왜 자신이 ‘시인밖에 아무것도 될 수 없는지’를 밝힌 자기 고백서다. 193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시인은 스스로를 “식민지 조선반도의 한 비옥한 농토에서 태어난 빈민 자식”이라고 소개했다. 일제 공출로 끝없이 일해도 먹을 쌀이 없던 시절이다. 그의 아버지는 꿈이 많았다. 늘 “내일이 있다”고 말했고, 보름달이 떠오르면 맨발로 마당으로 뛰쳐나가 덩실덩실 춤을 췄다. “우리도 두둥실 떠오르자”며 훨훨 날 듯 뛰어다니던 아버지의 신명은 지금도 그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언젠가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전쟁은 순수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시인은 “내가 6·25사변의 후방 사회에서 체험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인류사의 토대를 이뤄준 핏줄, 탯줄에 의한 생명의 기본 형식인 씨족이나 그 뒤에 만들어진 민족이라는 오랜 경험의 유산이 볼품없이 망가지는 일이었다”고 토로한다.

“나의 당숙들은 인공체제로 기울어졌고 나의 재당숙 쪽은 반동으로 낙인찍혀 감히 집안끼리 호칭으로도 부르기 어렵게 됐어요.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촌 아우를 보면 이쪽에서 재빨리 다른 길로 걸음을 틀어버렸지.”

남과 북이 전장에서 기세를 올릴 때마다 그의 마을에선 주민 간 학살과 보복학살이 반복됐다. 세 차례 공방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틈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그는 구덩이 속 송장을 꺼내는 작업을 해야 했다.

“썩은 시신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풍겼고, 빨랫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어요.”

마을이 황폐화할수록 그 자신도 폐허가 돼갔다. 학교를 그만뒀고, 집을 떠나 방황하면서 여러 번 자살을 기도했다. 1952년 출가해 불문에 든 뒤에도 방황은 이어졌다.

1월 7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저서 ‘두 세기의 달빛’ 등에 대해 소개하는 고은 시인. 박해윤 기자
1월 7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저서 ‘두 세기의 달빛’ 등에 대해 소개하는 고은 시인. 박해윤 기자

# 내 힘의 원천은 죽음

아이러니한 건 시인이 가진 생애 최초의 기억이 다섯 살 때 그가 살던 네 칸 초가가 불타 무너지는 장면이라는 점. 그는 “늦가을 어느 날 밤, 고모 등에 업혀 우리 집이 활활 타오르는 걸 본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다섯 살 때의 이 ‘사적 폐허 체험’은 1950년 열일곱 살의 ‘공적 폐허 체험’과 겹치면서 그를 허무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국밥을 사먹는다”(고은 시 ‘작은 노래’ 중 일부) 같은 지독한 자기혐오 시를 썼다.

우연히 읽은 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시집도 그를 시인의 삶으로 이끌었다. “하루가 지나면 발가락 한 개가 떨어져 나가는 걸 느끼며 멀고 먼 황톳길을 걸어가는” 시인의 삶을 읽고 그는 두 가지를 결심했다. 하나는 ‘문둥병’에 걸리는 것, 다른 하나는 ‘문둥병자’로 떠돌면서 시를 쓰는 것이다. 시인은 “나는 시를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다. 수메르 최초의 시인처럼 내 안 울음에서 시가 나왔다”고 했다. 그가 쓴 ‘눈 내리는 날’은 이렇다.

“소월 형/ 지용 형/ 당신네들 어렴풋이 알았을 거요/ 인류 맨 처음의 언어가/ 아아/ 였던 것// (중략) //지금 내 머리 위에서/ 어미 아비 없는 푸른 하늘/ 어미 아비 없는/ 아아/ 아아/ 이 막무가내의 아이들이 나에게 펄펄 내려앉고 있소/ 저 하늘의 마지막 손수건인가 보오.”

시인이 1973년 4월부터 77년 4월까지 기록한 일기 모음 ‘바람의 사상’에는 그의 또 다른 면모가 담겼다. 유신 복판에서 문학과 삶의 자유를 위해 싸운 지식인의 모습이다. 74년 10월 23일 “나 같은 순수 시인을 참여 시인으로 만들 것인가. 이 군인의 시대, 이 육군의 시대야. 이 총검의 시대야. 이 탱크의 시대야. 이 색안경의 시대야”라며 울부짖던 시인은 이틀 뒤 “이제 나는 거리에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다른 운명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너라 오너라, 그 어떤 파도 덩어리라도 오너라. 내가 너에게 파묻히겠다”는 결의를 밝힌다. 그해 11월 20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고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된 직후엔 “나는 이제 던져졌다. (중략) 나는 맹목적이다.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이 아닌가. 내 힘의 원천은 죽음이다. 죽음으로부터 나는 여기 와 있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후 그의 삶은 격랑에 휘몰렸다. 시인은 “그때의 삶을 자랑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맨 앞에서 깃발을 날린 사람이 아니라 맨 뒤에 이렇게 서 있던 사람”이라고 했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1977년과 79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관련 사건으로 구속됐고, 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독방에 갇혔다. 그때 간수들에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 너 하나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위협을 들으며 이후 30년간 이어진 연작시 ‘만인보’를 구상한 사실은 유명하다. 89년에는 북한의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들과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한 것이 문제가 돼 다시 투옥되기도 했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 앞으로 10년쯤 더 창작 작업

그의 일기에는 시인이 이 같은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굽이굽이가 낱낱이 기록돼 있다. 유신 폭력에 온몸으로 맞선 학생과 노동자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느꼈던 고통의 흔적도 생생하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1975년 그는 “1년간 소주 1000병을 통음했다”고 했다. 그와 더불어 시대를 ‘앓았던’ 시인 이문구가 ‘아주 박하게’ 계산한 것이 이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문학만은 놓지 않았다. 74년 12월 1일 시인은 “12월이다. 내 41세의 1년이 다 가고 있다. 책 6권 출판한 것 말고 그동안 내가 한 일이 무엇인가”라고 적었다. 술에서 깨면 글을 썼고, 그 고료를 받아 다시 술을 마셨다. “나는 왜 백수광부인가. 나는 왜 술만 먹으면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가”(1974년 5월 31일)라는 토로에서 그 시절 그의 방황이 읽힌다.

“육영수 끝내 숨졌다. 그 긴 치마. 그 웃음. 그 비정치적 기품”(1974년 8월 15일) “영구차가 떠날 때 대통령은 청와대에 혼자 남겨졌다. 권력은 슬프도다”(1974년 8월 18일) 같은 문장도 있다. 이 빛바랜 기록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쉬웠을까. 시인은 “내가 더는 시를 쓰지 못하고 일기나 묶어내는 늙은이가 된 건 아닌가 주춤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결코 시시한 글을 세상에 내보내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사적 기록이지만, 당시 생활 풍경과 타자의 모습이 들어 있죠. 내 소유물이 아니라, 매우 공공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요즘 거대담론과 더불어 미시 서술행위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비정치적 분야의 삶의 화석, 궤적 같은 것이 우리를 얼마나 풍요하게 하는가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역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행위가 될 수도 있겠죠.”

1970년대 첫머리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그는 지금도 일상을 기록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당분간 또 일기 모음을 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시를 써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시”라는 자의식이 그의 안에서 계속 꿈틀대기 때문이다. 그는 서재 책상 위에 놓인 ‘198’이라는 숫자가 적힌 종이를 가리켰다. 현재 쓰는 장시 초고라고 했다. ‘198’은 198장째라는 뜻. 시가 앞으로 얼마나 더 길게 이어질지 그 자신도 모른다. 시인은 “하늘과 땅, 심해 세계까지 아우르는 아주 긴 시다. 이걸 쓰려고 요새 심해에 대해 공부한다”고 말했다.

시인이 1966년 발표한 두 번째 시집 ‘해변의 운문집’ 후기에 “이 세상의 80세는 이제 50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대목이 나온다. 우울과 허무에 빠져 죽음만 생각하던 젊은 고은에게 ‘80세’는 아득하고 불편한 무엇이었을 게다. 하지만 올해 어느덧 여든이 된 그는 이 나이를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문학인생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우리 현대문학은 불우했어요. 김소월, 윤동주, 이상, 정지용 등 수많은 문인이 작품을 몇 편 남기지 못한 채 요절했죠. 가끔은 이들의 결핍이 내게 모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이 살지 못한 삶을 내가 살고 있고, 그들이 쓰지 못한 걸 내가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나의 작품세계가 더 커져야 해요.”

그는 이런 마음을 일종의 ‘공적인 사명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2월 초 이탈리아로 떠나 베니스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 학기 동안 연구와 강의를 하며 시를 쓸 예정이다. 그 후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는 ‘시 페스티벌’에 참석한다. “인류가 시작된 그곳을 둘러보고 돌아와 시를 쓰겠다”고 했다. 9월에는 30년 ‘안성 생활’을 마무리하고 경기 수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지만 그곳에서 “10년쯤 이어질 창작 작업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은 문학’의 새로운 출발이다.

시인은 지난해 출간한 시집 ‘마치 잔칫날처럼’에 실은 ‘시인의 말’에 “장차 내 부재의 어느 날도 존재이기를 누추하게 꿈꾸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로지 현재가 내 꿈의 장소다. 허나 현재란, 꿈이란 얼마나 천년의 가설인가”라고 썼다. 존재하는 한 시를 쓰고, 숨을 쉬듯 책을 내는 것이 그가 현재 꾸는 꿈의 전부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지쳐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은은한 황소울음 같은 시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젊은이가 더는 시를 읽지 않고, 문학이 힘을 잃었다는 세간의 ‘위기론’에도 끄떡없다. “시는 이미 다 죽어버렸는데, 나는 죽은지도 모르고,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라는 목소리에서 또 한 번 말간 문청의 얼굴이 떠올랐다.

# 노벨상? 평생 상 노린 적 없어

현일수 기자
현일수 기자
마지막으로 시인에게 매년 가을 우리 문단을 떠들썩하게 하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수년간 ‘유력후보’로 거론됐다가 번번이 수상에 실패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사실 전혀 아는 게 없고, 평생 어떤 상을 노려본 적도 없다. 과녁을 정해놓고 화살을 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혼잣말처럼 “그렇게 하는 건 참 바보지. 촌놈 중 촌놈이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10여 년간 늘 내 뒤통수에 ‘노벨문학상’이라는 말이 들러붙어 있었어요. 외국에 나가도 그럽니다. 한때는 신경 쓰였지만 이제는 그냥 놓아두죠. 난데없이 잠자리가 내 어깨에 앉을 때가 있잖아요. 그게 오래 있나요. 제풀에 날아가지. 상에 대한 얘기들은 그런 겁니다.”

직접 쓴 ‘전생연보’에서 그는 자신의 전생에 대해 “먼 옛날 세습 방랑시인으로 출생/ 한때 디오니소스의 친구/ (중략) 1847 안면도 출생, 귀머거리 머슴. 술을 너무 좋아했다”라고 적었다. 아득한 기원전 어느 날부터 ‘시인’이었던 그의 현생 꿈은 ‘○○상 수상자’가 아닌 ‘시인’으로 남는 것인 듯 보였다. 그는 시인이고,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채널A 영상] 또다시 한국 빗겨간 노벨문학상, 이유는?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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