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절망적 세상을 향한 구원의 돌려차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9일 03시 00분


연극 ‘청춘예찬’ ★★★★☆

창단 10주년을 맞은 극단 골목길 연작 페스티벌 ‘난로가 있는 골목길’의 마지막 작품으로 5년 만에 무대에 오른 ‘청춘예찬’. 스물둘에도 여전히 문제아 고등학생인 청년(김동원·가운데)이 살림을 차리겠다며 데려온, 다섯 살 연상에다 소아마비 후유증에 간질병까지 있는 여인(이봉련)을 놓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아버지(이규회)와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기싸움을 벌인다. 극단 골목길 제공
창단 10주년을 맞은 극단 골목길 연작 페스티벌 ‘난로가 있는 골목길’의 마지막 작품으로 5년 만에 무대에 오른 ‘청춘예찬’. 스물둘에도 여전히 문제아 고등학생인 청년(김동원·가운데)이 살림을 차리겠다며 데려온, 다섯 살 연상에다 소아마비 후유증에 간질병까지 있는 여인(이봉련)을 놓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아버지(이규회)와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기싸움을 벌인다. 극단 골목길 제공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연극을 보는 중간에 문득 기형도의 시 ‘오래된 서적’의 이 시구가 떠올랐다. 스물두 살 나이에 아직도 고등학생인 청년(김동원)의 영혼의 페이지는 온통 잿빛이다.

홀아비 신세인 아버지(이규회)와 맞담배질도 모자라 아비가 소주에 티백을 타 마시는 것을 보고 “영혼이 없는 소주나 마시고 있다”고 면박을 준다. 그런 녀석을 어떻게든 인간 만들어보려던 4년째 담임교사(김태균)조차 “너 좋아하는 술 매일 사 줄 테니 제발 학교 근처에도 나타나지 마라” 할 만큼 구제불능의 낙제생이다. 게다가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고 주먹까지 휘두른다. 그런 녀석이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동급생의 배다른 누나(이봉련)와 엉겁결에 하룻밤을 보낸다. 그런데 그 누나는 소아마비로 한쪽 발을 저는 데다 간질병까지 있다.

이쯤 되면 비행청소년(정확히는 비행청년)의 전형이라고 해야 하는데 또 딱히 그렇게 말하긴 어렵다. 녀석의 언행 하나하나가 사회적 통념에 비춰 너무도 어이가 없어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고 보면 녀석의 청춘은 온통 피멍투성이다.

녀석이 그처럼 구박하는 아비는 생활력 젬병의 사내이고 어미(정은경)는 부부싸움 도중 아비가 뿌린 염산에 시력을 잃고 이혼을 한 채 안마사가 돼 딴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아비는 툭하면 그 어미를 찾아가 손을 내밀고 어미는 자신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계속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아비를 쳐내지도 품어주지도 못한다.

기형도의 시 ‘위험한 가계·1969’를 압도하는 이런 가계도는 더욱 위태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녀석과 하룻밤을 보낸 간질병 걸린 누나가 임신을 한 것 같다며 달라붙는다. 온갖 욕설과 협박으로 누나를 떼어 내려던 녀석은 “그래 갈 데까지 가보자”라며 아비와 단둘이 사는 단칸방에서 살림을 차리겠다고 선포한다. 그 난감한 상황에서도 아비는 태연자약하게 답한다. “작정을 했구나, 막 살기로.”

얼핏 치기어린 위악(僞惡)처럼 보이던 청년의 돌발적 선택은 술상 앞에서 벌어진 부자간 육탄전으로 점입가경에 들어간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누나의 간절한 읍소와 간질병 발작이 터진다. 그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든다. 도대체 왜?

아비의 충고처럼 ‘인생은 금방이다’. 그걸 좀 유식한 말로 인생은 비가역적이라고 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아비의 한순간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게 된 청년의 가정이 이를 온몸으로 증언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 청년은 왜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불나방처럼 불태우려는 걸까.

청년의 무심한 대사 속에 답이 있다. 연극에선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어미를 청년은 ‘병신’이라고 부른다. 그 호칭은 간질병 걸린 누나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어미와 누나는 부조리한 세상의 폭력에 희생된 장애인이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청년은 사람들이 모두 외면하는 누나를 구원함으로써 아비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씻고자 한 것이다. 절망적 세상을 향한 기막힌 돌려차기인 동시에 거룩한 죄갚음이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근형과 그가 이끄는 극단 골목길의 출발점이라 할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다. 이 연극의 제목은 단지 ‘청춘은 아름다워’라는 통념을 비튼 것만이 아니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청춘이 진실로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이런 아들의 돌직구 같은 진심이 아비의 잠들었던 부성애를 일깨운다. 단칸방에서 아들 내외와 한 이불 덮고 자던 아비는 아들의 친구 용필(이호열)에게 불쑥 “널 낳아주신 분이 누군지 아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야 당연히 엄마죠”라는 용필의 답에 “아니다, 아버지다”라고 답한다. 사자소학(四字小學) 첫 구절에 나오는 ‘부생아신(父生我身)’을 염두에 둔 말이다. ‘나를 생성한 존재가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옛 아내를 찾아간 아비는 손주 낳으면 보라고 집 천장에 붙여놓은 별을 이야기한다. 거기서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칸트 철학과 조우한다. “내 마음을 늘 새롭게,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도덕법칙이다.”

인생의 비가역성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통째로 불태울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청춘은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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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멤버인 윤제문 씨가 아버지 역으로 번갈아 출연한다. 2월 10일까지 서울 대학로 스튜디오 76. 1만5000∼3만 원. 02-6012-284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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