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에 학교를 인수한 뒤 120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정부 지원금은 단 한 푼도 안 받았어요. 그런데도 ‘법정 부담금’을 한 푼도 안 내는 다른 학교와 똑같이 모든 규제를 받습니다. 내 돈을 들여도 교사를 더 뽑을 수도, 학생들에게 최신 기술을 가르칠 수도 없어요.” 학교법인 이산학원의 김종현 이사장은 교육계에선 남다른 이력을 가진 인사다. 미국 조지아텍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 이사장은 한국에 돌아와 철강회사로 부(富)를 일궜다. 2000년대 초반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외국어고를 세워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던 그는 대신 성적과 기반시설 수준이 뒤떨어지는 경기 안산시 단원구의 한국디지털미디어고(디미고)를 인수했다. 2002년에 한국 최초의 정보기술(IT) 특성화고로 개교했지만 열악한 재정상태에 ‘실업계고’라는 굴레가 더해져 고전하던 학교였다. 》
그가 외고를 마다하고 특성화고를 택한 이유는 IT 부문이 한국 경제를 이끌어갈 산업분야로 미래 세대를 위한 일자리 창출의 핵심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요즘 제조업은 10억 원을 투자하면 3명이 먹고사는데 IT는 같은 규모의 투자로 20명이 먹고살 수 있다”며 “애플의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스무 살 즈음에 회사를 세워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런 길을 터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이 디미고를 인수한 뒤 평범했던 학교시설은 미국의 고급 ‘보딩 스쿨’처럼 바뀌었다. 그는 우선 최첨단 IT 장비가 갖춰진 정보기술문화센터, 실내외 다목적 체육관, 전교생을 수용하는 기숙사를 세웠다. 곧 야구장과 수영장도 지을 계획이다. 또 학생들이 최첨단 기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교내의 모든 IT 장비는 최신 제품이 나올 때마다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학교발전기금만 60억 원이 넘는다.
이렇게 학교 건물 등 ‘하드웨어’는 그의 의지로 바꿀 수 있었지만 학교를 옥죄는 다양한 규제는 그렇지 않았다. 교과과정, 교사들은 모두 해묵은 규제에 갇혀 있었다.
처음 학교에 왔을 때 김 이사장은 교과과정에서 제일 큰 충격을 받았다. 학생들이 1980년대 프로그램인 ‘터보C’를 배우고 있었다. 그가 “당장 터보C++로 바꾸라”고 하자 교사들은 “교과서가 없다” “교과과정은 1년 전에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좋은 교사를 많이 뽑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은 학급 수에 따라 교사 수를 제한하고 있고, 각 시도교육청이 교원 배치 기준을 정해 놨다. 고교는 통상 3학급까지는 학급당 교사 3명, 한 학급이 증가할 때마다 교사를 2명씩 늘릴 수 있다. 행정직원도 학급 수의 3분의 1까지만 쓸 수 있다.
특성화고는 현직에 있는 해당 분야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한데도 ‘산학(産學)겸임 교사’의 수도 제한(교사 정원의 3분의 1 이하)돼 있었다. 이마저도 기존 교사의 정원에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교사를 대체하는 방식으로만 쓸 수 있었다.
학교는 기업처럼 ‘인센티브’를 동원해 우수인재를 영입할 길도 없었다. 시간외 수당은 시간당 3만5000∼4만 원으로 묶여 있고 ‘교원 성과금’도 정부가 정해 놓은 탓이었다. 고육지책으로 김 이사장은 법인회계를 들여 교사들에게 인센티브를 준다.
교직원들 역시 김 이사장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교사 자격증을 가진 8명의 교직원이 기숙사의 생활관리를 전담하고, 교과를 맡은 교사들이 방과 후에 학생을 상대로 ‘멘토링’을 진행한다. 또 학교 자체적으로 ‘e러닝스튜디오’를 만들어 인터넷 강의도 제공한다.
남다른 투자와 관심 덕에 디미고의 대학 진학 실적은 우수하다. 입학생 수준은 중학교 내신 상위 15% 정도. 그러나 사(私)교육 없이 전원 기숙사 생활을 3년 한 뒤 학생들의 평균 성적은 수능 상위 3%로 뛰었다. 졸업생 절반 이상은 서울 소재 상위권대로 진학하고 있다.
IT 특성화고답게 이 분야의 실적은 더 뛰어나다. e비즈니스과, 디지털콘텐츠과, 웹프로그래밍과, 해킹방어과 등 4개과의 전교생 수는 630명. 이들은 2012년 한국정보올림피아드에서 대상 금상 은상을 휩쓸었고,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서는 동상을 탔다. 고교생 창업분야에서는 ‘대한민국 인재상’도 받았다.
일찍부터 이론과 실무를 익힌 재학생들은 이미 창업과 일자리 창출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앱 창작 동아리’는 180여 개의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90만 건의 다운로드 기록을 세웠고 동아리 내의 7개 팀이 사업자로 등록하는 등 실제 창업에 성공했다. 이 학교 내 4개 IT연구팀과 18개 창업동아리에는 255명이 참여하고 있다. 재학 중, 또는 졸업 직후 창업한 학생들은 대학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이 학교에도 고민이 있다. ‘IT 영재’로 큰 학생들이 대학 진학에서 불이익을 받는 점이다. 정부가 “고졸 취업 문화를 구축한다”는 취지로 대학 정원의 5%였던 특성화고 동일계 진학쿼터를 1.5%로 줄였기 때문이다. 특성화고는 일반교과 수업이 규제에 묶여 있다.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 관련 교과의 수업 시간이 일반계고의 절반 정도로 제한돼 있다.
그는 현재 특성화고만 세울 수 있는 IT 고교 교과과정에 과학고, 외고처럼 ‘특수목적고’를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이사장은 “과학고 졸업생은 의대로 쏠리고, 외고 졸업생은 어학과 무관한 학과에 진학하는데도 특목고로 분류해 우대하면서 이 시대 모든 산업과 학문의 기반인 IT는 전근대적인 규제로 손발이 묶여 있다”며 “교과부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만 바꾸면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IT 특목고를 만들면 영재들이 고교 단계에서 창업도 하고 대학에 가서 융합도 해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고속도로를 뚫어주는 것이란 지적이다.
IT 특목고를 전국의 과학고(영재고 포함 22개) 수만큼 세운다면 디미고 교직원(59명) 기준으로 약 1300개의 교직원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산학겸임 교사의 정원 규제를 풀고 국영수 수업 제한을 풀어 교과 교사를 늘린다면 학교당 최대 100명, 2200여 개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
이들 학교 재학생들의 IT 개발, 창업 등으로 파생되는 일자리 역시 많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 이사장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와 그 부인이 세운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미국의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각 학교에 IT교육 커리큘럼을 세팅해주는 것”이라며 “미래 일자리를 위해 IT 교육을 집중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