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인 딸을 대신해 생후 8개월 된 외손녀를 돌보는 윤모 씨(60·경기 고양시 일산)는 아기를 보는 틈틈이 인터넷 쇼핑을 하며 육아용품을 사들인다. 일 때문에 늦게 퇴근하는 딸이 기저귀나 분유 주문을 제때 못해 늘 쩔쩔매면서 ‘육아 경제권’을 아예 윤 씨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윤 씨는 “혼자 아이를 보다 보니 외출할 시간이 없어 주로 인터넷으로 기저귀나 분유를 산다”고 전했다.
지난해 말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배우자가 있는 가구의 43.5%인 약 510만 가구가 맞벌이를 하고 있다. 육아 관련 업계는 맞벌이 가구의 40∼60%가 부모에게 육아를 완전히 맡기거나 일부라도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조부모가 아기를 돌보는 경우가 늘면서 이들이 육아용품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 육아용품 구매하는 할머니
오픈마켓 11번가가 고객 연령대별 구매 행태를 분석한 결과 50∼70대 고객의 2012년 결제금액은 전년 대비 45% 증가했다. 특히 60, 70대는 기저귀나 분유, 유아식 등 육아용품을 가장 많이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11번가 측은 “구매 패턴 등을 분석했을 때 맞벌이 자녀를 대신해 손자 손녀를 키우는 실버 계층이 직접 관련 상품을 구매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석했다.
‘실버 육아’에 맞춰 육아용품들도 진화하고 있다. 출산 휴가가 끝나자마자 생후 3개월 된 아들을 지방에 사는 시어머니 댁에 맡긴 워킹맘 이모 씨(32·서울 서초구 서초동)는 살균소독기와 이유식마스터 등 육아 편의를 돕는 제품들을 잔뜩 구입해 갖다 드렸다. 이 씨는 “힘에 부치실까봐 죄송스럽기도 했고, 젊은 사람들만큼 위생적으로 젖병이나 장난감을 관리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며 “위생에 신경 써 달라고 하면 어머니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봐 아기 볼 때 편하시라고 샀다고 말씀드렸다”고 전했다.
○ 육아 편의 돕는 상품 봇물
4∼7일 열린 서울국제임신출산용품 전시회 ‘베페 베이비페어’에선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와 함께 부스를 돌아다니는 젊은 엄마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치코가 최근 출시한 ‘뉴 스팀 이유식 마스터 초콜릿’ 부스에도 어머니와 함께 온 주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찜과 믹서 기능이 결합돼 쉽고 빠르게 이유식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을 내세운 제품이다.
둘째를 임신한 워킹맘 김모 씨(35·경기 용인시 죽전동)는 아예 배달 이유식을 알아보고 있다. 김 씨는 “시어머니가 첫째에게 매번 똑같은 죽을 먹여서 불만이었는데 직접 만들어 먹일 시간도 없어서 배달식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배달 이유식 전문업체 베베쿡 박수진 과장은 “모녀가 함께 찾아온 사례가 특히 많아 눈길을 끌었다”고 전했다.
‘할머니 육아’를 돕는 스마트 기기들도 눈길을 끌었다. 요미아시아의 ‘요미’는 버튼만 누르면 60초 안에 우유가 모유 온도인 32∼34도로 데워지는 젖병이다. 감에 의존하던 할머니들이 좀 더 정확하게 온도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는 설명이다. 제로투세븐이 수입하는 토미티피의 ‘클로저 투 네이처 센서티브 스마트 젖병’은 스마트 온도 센서가 있어 분유를 타는 동안 온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옛날 방식대로 끓는 물에 젖병이나 장난감 등을 살균하면 환경 호르몬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젊은 주부들이 많아 육아용 살균 용품들도 진화하고 있다. 교원그룹의 ‘교원 와우 살균수기’는 열을 가하거나 세제를 안 써도 채소와 과일 같은 식재료와 육아용품을 살균 소독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손잡이 단추만 누르면 자동으로 유모차가 접히고 펴지게 한 포맘스의 ‘오리가미 유모차’도 관절이 약한 할머니들에게 인기다.
한경혜 서울대 교수(가족아동학)는 “현재 노인층은 이전 세대와 달리 경제력과 지식수준이 낮지 않은 편”이라며 “육아를 직접 하지 않더라도 경제적 지원을 하는 사례도 많아 조부모가 점점 더 육아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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