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남한에 전달하는 메신저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를 택한 것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에 비해 편한 상대여서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후 주석보다 원 총리에 대한 김정일의 개인적 신뢰가 더 높았던 것 같다고 정부 당국자는 말했다.
원 총리는 2009년 10월 4일 중국 총리로서는 18년 만에 방북했다. 당시 북한은 2차 핵실험(2009년 5월 25일)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 등 국제적 압박을 받고 있던 때였다. 국제사회의 대북 돈줄 죄기 때문에 고통받던 북한에 원 총리는 2200억 원 규모의 압록강대교 건설 등의 내용을 담은 ‘경제원조에 관한 교환문서’를 선물함으로써 숨통을 틔워줬다. 당시 김정일은 공항으로 영접을 나가고 ‘북한판 홍루몽’ ‘아리랑’을 같이 관람하고 3박4일 동안 5차례나 정상회담을 하는 파격적인 대우로 원 총리에게 화답했다. 그만큼 김정일이 원 총리에게 느끼는 감사의 정도와 두 사람 간 유대감이 크고 깊었다.
원 총리는 평소 북한이 듣기 싫어하는 개혁·개방의 필요성도 김정일 면전에서 거론할 정도로 두 사람 간에는 격의 없고 깊은 대화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후 주석과 달리 ‘원 할아버지(溫爺爺)’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원 총리의 친화력도 두 사람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재료가 됐을 것이라고 한 정보 소식통은 전했다.
원 총리가 ‘공산당 중앙재경영도소조’ 조장을 맡아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경제문제를 담당했던 것도 김정일과의 친밀함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외교담당인 후 주석에게 북한은 임기 10년 내내 정치적으로 피곤한 존재였던 반면 경제담당인 원 총리는 비교적 유연하게 북한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김정일은 원 총리를 북한-중국-한국을 잇는 메신저의 적임자로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원 총리는 2009년 10월 10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서 직전에 있었던 자신의 방북 결과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상세히 설명하며 메신저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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