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의 어느 저녁. 사회부 법조팀에 갓 들어와 우왕좌왕하고 있던 내게 한 선배가 저녁 약속에 함께 가자고 했다. ‘검사’라고 불리는 사람과의 첫 만남. 큰 잘못 없이 살아왔는데도 묘하게 손발이 저렸다. 그는 ‘서울중앙지검 공안부’라는, 정확히 뭐하는 곳인지 모르지만 뭔가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곳으로 느껴지던, 그런 곳의 ‘검사’였다.
“공안검사는 머리에 뿔나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람인 줄 알았지?” 자리에 앉자마자 던진 선배의 첫마디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간첩 잡는다’는 사람이 이렇게 평범하고, 때론 재미있어도 되나 싶었다. 적어도 내겐 간첩이란 어린이날마다 TV에서 봤던 ‘똘이장군 제3땅굴 편’에 나오는 ‘가면 쓴 돼지’(정확히는 ‘붉은 수령’)의 부하 늑대거나, 비행기를 폭파한 뒤 독약을 삼키고 죽는 극악무도한 존재였다. 그런 자들을 잡으려면 당연히 검사도 좀 ‘달라 보여야’ 했다.
그 후 3년 반이 넘게 숱한 간첩 사건을 취재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기사에 다 담지는 못했지만, 먼발치에서 간첩의 뒷모습을 지켜보기도 했고 그들의 숨겨진 눈물겨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간첩 검거에 얽힌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취재기자의 시선으로 소개한다.
“아직도 간첩이 있나요?”
취재에 앞서 주변 사람들에게 ‘간첩’에 대해 가장 궁금한 점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대부분 “아직도 간첩이 있나요?”와 “왜 잡히기 전에 독약으로 자살 안 해요?”라는 질문을 먼저 꺼냈다. 영화 ‘베를린’과 드라마 ‘아이리스’에 나오는 ‘블랙요원(비밀요원)’이 실제로 있는지, 영화 ‘의형제’나 ‘간첩’에 나오는 고정간첩이 얼마나 되는지도 물었다.
일단 ‘간첩’이 무엇인지부터 파헤쳐 보자. 법률적 의미에서 간첩은 반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아 국가 기밀 또는 군사상 기밀을 탐지 및 수집(국가보안법 4조 1항 2호)한 사람을 말한다. 쉽게 말해 북한의 지시를 받아 군부대를 촬영하면 간첩(spy)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북한의 지시로 살인, 방화, 폭행, 폭파, 기밀탐지, 수돗물 오염, 위조화폐 사용 등(국가보안법 4조)을 저지르면 모두 간첩으로 분류된다.
2008년부터 최근 5년여간 구속된 간첩은 모두 31명. 이 가운데 북한이 직접 보낸 간첩은 12명이다. 그럼 이들은 왜 KAL기 폭파범 김승일처럼 독약 앰풀을 깨물지 못했을까. 최근 검거된 간첩들이 대부분 탈북자로 꾸며 들어오기 때문이다. 1998년부터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는 모두 2만4000여 명. 이 속에 숨어 들어오기 때문에 가려내기가 무척 까다롭다. 하지만 간첩 입장에서도 짜증은 난다. 칫솔, 양말은 몰라도 총이나 독침, 독약을 가져올 수가 없다. 어금니 안쪽에 끼워서? 소용없다. X선 검사 등 정밀 신체검사 과정에서 곧바로 들킨다. 게다가 모든 탈북자들은 합동신문센터에서 정예 수사관들의 신문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거짓말이 들통 나면 ‘게임 오버’다. 2011년 한 남파 간첩은 붙잡히면 자살하려고 운동화 끈과 면도날을 감췄다가 바로 들켰다.
그러면 첩보 영화에 나오는 ‘블랙요원’은 과연 있을까?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그 규모나 조직은 기밀이다. “국내에서 암약하는 고정간첩이 5만 명”이라는 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폭로도 있었지만 이 또한 구체적인 수치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을 것”이라는 게 수사기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게 얼만데?”라는 질문엔 “알면 다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간첩도 다 같은 간첩이 아니에요”
영화에서 대남공작기구로 암시되던 ‘작전부’나 ‘24호실’ 등은 실제로 존재할까? 정답은 ‘있다’다. 다만 배우 김소연, 임수향처럼 예쁜 ‘여전사’들도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공수사기관에서 가장 위협적으로 생각하는 곳은 북한의 ‘정찰총국’과 ‘225국’이다. 정찰총국은 노동당 작전부와 35호실, 인민무력부 정찰국을 통합해 2009년 초 만들어졌다. 여긴 “맨손으로 열댓 명은 거뜬히 때려눕힌다”는 최정예 엘리트 공작원을 키워내는 기관이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에도 이곳이 깊숙이 관여했다. 이곳 공작원들은 ‘초대소’라고 불리는 훈련기관에서 3, 4년간 ‘밀봉교육’이라고 불리는 ‘지옥훈련’을 받는다.
한 공작원은 위장 탈북을 위해 중국에 머무르던 중 폭력배가 피우던 담배를 순식간에 발로 차 끊어버려 다른 탈북자들의 의심을 받았다. 또 다른 공작원은 수사 과정에서 “칼을 던져 20m 이내에 있는 물건은 모두 맞힐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들은 명문 군사대학을 졸업한 뒤 공작원으로 선발되며 영어, 중국어를 비롯해 한국의 문화환경도 공부한다. 초대소 지하갱도에는 한국 거리와 상점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한국 물건을 사고파는 연습도 한다. 때론 군사분계선 근처까지 침투했다가 돌아가고 중국 등지에서 화물차 운전 등을 하며 정찰 및 탐지 업무에 투입된다. 황장엽 살해 지령을 받고 내려온 김명호, 동명관, 이동삼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225국은 정찰총국과는 다른 전략을 편다. 225국은 한국 내 정재계, 사회단체 인사를 포섭한 뒤 ‘지하당’을 결성하도록 한다. 은밀히 국내 동향을 살피다가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나면 동참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을 적용하면 정찰총국은 즉각 타격 방식의 ‘기동전’을, 225국은 장기 전술인 ‘진지전’을 펴고 있다. 225국은 2006년 ‘일심회 사건’과 2011년 ‘왕재산 사건’의 배후조직이다.
‘질보다 양’을 우선시하는 기관도 있다. 비밀경찰인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와 조선인민군 보위사령부(보위사)다. 최근 6년간 구속된 간첩 가운데 8명이 보위부, 3명이 보위사의 지령을 받았다. 이 두 곳은 북한 내 반체제 활동을 감시하고 적발하는 기관이지만 2000년대 초부터 꾸준히 공작원을 한국에 들여보내거나 국내 인물을 포섭해 정보를 수집해 왔다. 다만 이들은 1, 2주가량 단기속성훈련을 받는 데다 수집하는 정보도 대부분 기밀로 분류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박리다매(薄利多賣), 아니면 ‘알바형’ 간첩이라고나 할까.
“초등학교 뒷산에 무엇이 있었나요?”
혹독한 훈련을 거친 공작원이 남한에서 적발되는 이유는 뭘까? 뼈가 부러질 듯한 고문이나 약물주사에 의한 자백은 영화에서나 나올 일이다. 이들을 잡아내는 기술은 허를 찌르는 질문을 앞세운 ‘고도의 심리전’에 있다.
2010년 4월 황장엽 암살 지령을 받고 내려온 김명호를 잡은 것은 “당신이 졸업한 초등학교 뒷산에 어떤 나무가 있었나요?”라는 합동신문센터 수사관의 평범한 질문이었다. 김명호는 북한에서 이미 사망한 ‘김명삼’으로 신분을 꾸미기로 하고 4, 5년간 출신 학교와 연고지를 답사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다. 교실 수와 운동장 구조물, 교사 이름까지도 모두 숙지했다. 그런 그였지만 예상치 못한 이 질문엔 당황했다. 국가정보원 수사팀은 탈북자의 진술 등으로 재구성된 북한 각지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놓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던지는 수천 가지 질문 가운데 하나가 간첩을 가려낸다. 북한도 합동신문에 대비해 ‘문제은행’을 만들어 놓고 공작원을 가르치지만 예상 질문은 번번이 빗나간다.
국정원이나 경찰이 받는 수많은 제보도 국내에서 암약하는 간첩을 적발하는 무기가 된다. 해외 블랙요원들이 수집하는 정보나 수사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단서도 간첩을 검거하는 주요 루트다. 국가보안법은 다른 법에는 없는 ‘공소보류’라는 특수한 법률조항을 두고 있다. 반국가단체의 활동이나 간첩 조직 등에 대해 중요한 제보를 하는 사람은 간첩 혐의가 인정돼도 선처하는 제도다. 최근 6년간 이 조항이 적용된 사례도 극히 드물지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간첩은 고문을 받을까? 천만의 말씀. 그랬다간 간첩 잡기 전에 수사팀이 먼저 해체된다. 반복되는 질문에 계속 대답해야 하는 합동신문센터의 조사는 다소 고통스럽지만 신체적 위협은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간첩으로 적발된 뒤부터는 더 엄밀한 법적 절차에 따라 움직인다. 검찰은 이들이 송치되면 국정원 수사팀을 배제한 채 고문 여부부터 확인한다. 법원은 비공개 재판을 열기도 하지만 일반 재판과 같은 절차가 지켜진다. 검찰 수사를 받던 한 공작원은 “법적 절차에 따라 조사하는 것이 놀랍다. 이런 것이 자유민주주의구나”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백’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영화 ‘베를린’에서 북한 고위간부 동중호의 아들 동명수(류승범)는 주독일 북한대사관의 비자금을 가로채기 위해 비밀공작원 표종성(하정우)을 압박한다.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할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한다. 주요 임무를 맡아 현장에 투입되는 공작원들은 대부분 능력 있고 성실하지만 북한 사회에서 ‘백’이 없는 사람들이다. 엘리트 공작원으로 선발되는 것은 북한 내에서도 ‘가문의 영광’이지만 집안이나 배경이 좋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현장에서 빠진다. ‘표종성’은 몸으로 때우고 ‘동명수’는 잇속만 챙기는 식이다.
남파 공작원의 나이는 대부분 30대 중후반. 이들은 20대 후반쯤 당의 지시로 배우자를 맞는데 이쯤이면 자녀들이 5∼10세로 가장 예쁠 때다. 지령을 주기 전 북한 공작기관은 이들에게 벤츠 등 고급 승용차를 내주고 아이들과 놀이동산이나 백화점에 가서 놀아주도록 권한다. 저녁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초대해 “너희 아버지는 영웅”이라고 치켜세운다. 이 순간 공작원들은 한편으로 ‘최고 예우에 대한 고마움’을, 다른 한편으로 ‘가족을 볼모로 잡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이 때문에 공작원들은 검거된 뒤에도 가족 걱정에 잠을 못 이룬다. 때론 그리움에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언론 보도에 가족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극도로 꺼린다.
간첩 사건을 수사하는 국정원 수사관이나 검사들은 종종 이들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낀다고 했다. ‘소녀시대’ 뮤직비디오에 관심을 보이고, 때론 밥보다 컵라면을 먹고 싶어 하는 동시대의 인간이다. 그럼에도 한 사람은 ‘간첩’으로, 다른 한 사람은 이들을 처벌하는 ‘검사’로 마주앉는다. ‘분단의 비극’이 낳은 엄연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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