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도. 삼월이라지만 봄치곤 좀 추운 아침이었다. 서울 세검정 자택에서 장사익은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 오후에 있을 어떤 제사 생각에 그는 설렜다. 이날은 ‘형님’이 죽은 날이었다. 타악 연주자, 세서가(細書家), 모터사이클 광, 또는 다 합쳐 자유인. 누군가는 기인, 광인. 다른 이는 천상예인이라 부르는 사람, 고(故) 김대환 형님(1933∼2004).
#2. 2013년 3월 1일 오후 3시 - 무대 위의 ‘빅 브러더’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덕궁 옆에 볕이 들었다. 궁 서쪽 담벼락 밖에 있는 북촌창우극장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대 위 왼쪽에는 장사익이 아침에 쓴 ‘김대환 형님 봄입니다’가 걸렸다. 오른쪽에는 일본의 전통음악 명인 오쿠라 쇼노스케가 당일 써내려간 반야심경이 붙었다. 그 아래는 남유소 화백이 그려온 그림이 차지했고, 이 모두 위에 스크린이 자리했다. 가운데는 김대환의 자리였다. 꽁지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끼고 왼손으로 턱을 괸 모습이 마치 오늘 무대를 감시하는 ‘빅 브러더’ 같다. 큰형님? 그래. 오늘 모인 사람들은 그를 형님, 큰형님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그냥 ‘크신 분’이라 일컫기도 했다.
#3. 2013년 3월 1일 오후 4시 - 영정, 살아나다
100석짜리 극장에 관객 180명이 들어찼다. 넘쳐난 사람들이 객석 사이 계단에, 무대 위 양편 가장자리에까지 흘러 앉았다. 범람 같았다. 20명 넘는 연주자들도 숨는 법 없었다. 그들이 양반다리인지 똬리인지를 틀고 앉은 무대 한쪽이 곧 대기실이었다.
무대 위 스크린에 김대환의 영상이 나타났다. 검은 재킷에 검은 선글라스, 검은 모자를 눌러쓴 그의 나이는 가늠하기 힘들다. 열 손가락 사이사이에 북채, 장구채, 드럼 스틱을 섞어 총 6개의 채를 야무지게 틀어쥔 그가 내리치는 북에서 천둥과 비의 소리가 들고났다. 김대환의 호는 흑우(黑雨·검은 비)다. 밤에 쏟아 붓는 검은 비처럼 보이지 않지만 죽비처럼 인간을 깨우는, 존재의 소리. 1994년, 김대환이 일본의 부토(일본 현대무용의 한 갈래) 단체를 방문했을 때 연주한 실황 영상이었다. 연주가 그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또 다른 폭우를 만들어냈다. 무대 오른쪽으로 일본인들도 보였다. 일본 전통 북 연주 명인 오쿠라 쇼노스케도 있었다. 시작이었다. 한바탕 춤판, 소리판, 웃음판. 유쾌한 김대환 9주기 추모 콘서트의, 눈물 한 방울 없는 발칙한 추모제의 시작은 더 발칙했다. 엽기적인 장례였다.
#4. 2004년 3월 1일 밤 - 이런 장례 봤소?
서울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큰 소리가 났다. ‘소리만 좇던 큰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우리까지 조용해지면 되겠느냐’는 숙덕임이 신호였다. 고 박병천 선생의 씻김굿이 시작됐다. 춤꾼 이애주의 살풀이와 장사익의 소리가 더해졌다. 아예 김대환이 생전에 녹음한 음반이 틀어졌다. 여기 강은일의 해금, 허윤정의 거문고가 섞여들며 산 자와 죽은 자의 기묘한 합주가 시작됐다. 진혼을 위한 즉흥연주가 시작됐다. 옆 빈소에서 들고 일어났다. “숙연한 자리에 웬 딴따라들이 몰려와서 소란이오?!” “이거, 미친 것들 아냐!?” 항의하러 온 다른 조문객들은 장례식장에서 펼쳐지는 이색 풍경에 이내 빠져들었다. 예인들의 악기와 목청에서 폭우처럼 넘쳐나는 곡(哭)인지 곡(曲)인지 모를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추모였고 그 나름대로 처연한 의식과도 같았다.
#5. 2013년 3월 1일 오후 4시 30분 - 사물놀이
징, 꽹과리, 장구, 북. 이렇게 사물(四物)이 늘어서자 무대 위가 꽉 찼다. 앞선 영상 속 고인의 연주를 이으려는 듯 한국 타악의 진수인 사물놀이가 펼쳐졌다. ‘타다앗 타다앗 탓 타다다앗.’ 이광수 선생의 꽹과리가 장단을 주도하는 가운데 무대 위 스크린에 김대환의 생전 사진이 나타났다. 선글라스를 끼고 꽁지머리를 늘어뜨린 채 앞에 놓인 오토바이 헬멧을 장갑 낀 손으로 그러쥐고 있는 야무진 모습. 사물은 모터사이클이 구동되듯 일사불란하게 음의 공간을 질주했다.
#6. 2004년 3월 3일 오전 - 도심을 흔든 기이한 노제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 번쩍이는 거대한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30대가 늘어섰다. 건널목에 멈춰 선 시민들의 눈길이 거기 고정됐다. ‘국장(國葬)이라도 열린 걸까. 어마어마하군.’ 저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행렬은 광화문 앞을 빠르게 지나쳤다. 고인이 30년간 고행 같은 연습을 했던 인사동을 한 바퀴 돌아 대학로로 향했다. 운구 행렬이었다. 노제의 선두에 김대환의 유구가 있었다. 대학로의 재즈카페 ‘천년동안도’와 길에서도 큰형님을 추모하는 산 자들의 풍악이 이어졌다.
그는 생전에 오토바이광이었다. 그의 연습실을 2층에 인 서울 인사동 아리랑 명품관 앞에 할리 데이비슨 한 대가 멈춰서 있으면 ‘여기 김대환 연습 중’이라는 뜻이었다.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는 노래도 있지만 그는 오토바이로 리듬을 탔다. 무대 위에 거대한 오토바이를 올려두고 ‘투두두두 투두두두 툿 투두 툿 투두’ 하는 배기통 소리에 맞춰 북을 두들기던 유명한 ‘오토바이-타악 협연’은 전설이 아닌 실제였다.
#7. 2013년 3월 1일 오후 5시 - 한국의 아버지, 절 받으세요
사물이 연주를 그치자 이날 공연의 사회를 맡은 백발동안의 전통공연 연출가 진옥섭이 입술을 뗐다. “오늘 이 자리에는 정말 많은 분들이 자리했습니다. 앞서 영상에서 잠깐 봤던 일본의 부토 무용가분들을 모시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진청색 의상을 맞춰 입은 일본 여성 둘, 가가야 사나에와 도모에 시즈네가 무대에 올랐다. 명상음악을 배경으로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매우 느리게 팔다리를 움직이는 부토를 췄다. 부토는 일본의 전통예술인 가부키와 노에 서구 현대무용이 결합돼 만들어진 전위 무용의 일종이다. 그들의 유장한 춤은 9분간 이어졌다. 세로로 선 북을 난타하는 김대환 선생의 전신이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연주곡 ‘사막’이 무대를 이어받았다. 스페인풍의 우수에 찬 기타 연주가 달콤쌉싸래한 분산화음과 신경질적인 트레몰로를 오가며 5분 30초 동안 객석을 사로잡았다.
일본전통 타악 연주의 명인으로 꼽히는 오쿠라 쇼노스케가 바통을 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연주자들이 3·1절에 벌이는 묘한 이어달리기였다. 그는 무대에 오르자마자 객석을 등지고 중앙의 김대환 사진을 향해 큰절부터 올렸다. 이어 작은 장구처럼 생긴 일본 전통 타악기 쓰즈미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두들기며 ‘이야우허우허!’ 하는 기이한 구음을 내기 시작했다.
음악적 부친에 대한 예였다. 오쿠라는 김대환을 ‘한국의 아버지’라 부른다. 김대환은 1980년대부터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기존 박자체계를 해체하고 무질서 속에 질서를 담아내는 그의 절묘한 프리재즈 타악 연주를 먼저 알아본 건 재즈 마니아가 많은 일본이었다. 오쿠라는 1990년대 김대환을 만나고 음악적 교류를 이어갔다. 그는 김대환 추모 콘서트에 1회 때부터 빠짐없이 참석했다. 오쿠라는 “김대환 선생은 음악적 테크닉과 인격 양면에서 내가 만나본 최고의 인물”이라며 “추모제의 장소는 좁지만 (그를 그리는) 생각은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오쿠라의 연주에 경기민요 소리꾼 김보라의 구음이 겹쳐졌다. 한일 음악인의 즉흥교감은 제3의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음은 오쿠라의 구음과 타악에 요코자와 가즈야의 전통 피리 연주, 아키 와쿠나이의 일본어 시낭송이 합쳐졌다.
▼ 예인, 기인, 광인, 아니 그냥 ‘크신 분’에게 ▼
요코자와는 가슴팍에 오카리나와 닮은 피리를 곱게 받쳐 든 채 구음을 했는데 음성이 피리에 닿으며 나는 배음(倍音)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객석은 알 수 없는 언어와 낯선 소리의 이채로운 조합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장사익은 “추모 콘서트가 시작된 초기에는 객석에서 ‘3·1절에 일본의 뿌리가 담긴 전통음악이 한국 땅 가운데에서 당당히 울려 퍼지는 게 말이 되느냐’는 큰소리도 나왔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연주가 다시 등장했다. 유명한 북과 오토바이 배기통의 생전 협연 장면이 스크린 위에 흘렀다. 그 음파가 무대 위 연주자들의 실시간 연주와 겹쳐졌다. 생과 사가 교감하고 소통하기 시작했다. 9년 전 고인의 장례식장에서 열린 기괴한 합주가 재연되는 영험한 순간이었다.
시간은 어느새 7시를 향하고 있었다. 진옥섭은 “여러분의 방광이 2배가 되는 이 공연, 올해는 다행히 약간 짧아진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떤다.
피날레를 장식하러 장사익이 무대에 올랐다. 김광석의 기타 반주에 맞춰 ‘빛과 그림자’로 목을 푼 그는 ‘잘 있거라 나는 간다∼’ 하며 ‘대전 블루스’를 구성지게 뽑았다. 객석과 무대는 비로소 하나가 돼 ‘대전발 0시 50분’을 제창했고 장사익은 ‘김대환∼ 김대환∼ 김대환의 블루스’로 노랫말을 바꿔 불렀다. 이제 ‘추모’는 온 데 간 데 없다. 함께 웃고 노래하는 잔치가 됐다. 손으로 턱을 괸 채 심각한 표정을 한 김대환의 영정까지도 신명과 해학의 일부가 되는 듯했다. 어느새 곡목은 ‘봄날은 간다’로 바뀌었다. 고석진의 북, 최선배의 트럼펫 연주가 가세했다. “C마이너, 아니, C로, ‘돌아가는 삼각지’ 한번 해봐∼” 장사익의 주문에 최선배의 트럼펫이 먼저 운다.
양악과 국악, 고전과 즉흥, 한국과 일본의 정신이 한데 어우러지는 이런 무대를 어디 다른 곳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할 때쯤 무대에 출연진이 모두 올라온다. 늘 마지막은 이거다. ‘아리랑’.
“일본분들도 1원 한 장, 국물 하나 없어요.”(장사익) ‘노 개런티’, 출연료 없는 공연이다. 근데 한 500만 원씩 받은 이들처럼 죽기 살기로 연주한다. 신명을 길게 끈 연주가 끝나자 장사익이 영정에 대고 선창한다. “대환 형님, 빠이빠이!” “빠이빠이!!” 무슨 추모가 이래?
#8 2013년 3월 1일 오후 9시 - “형님, 빠이빠이!”
서울 인사동 한식집 ‘양반댁’. 1만 원씩 내면 김대환 추모 콘서트 뒤풀이에 누구나 동석할 수 있다. 밥만 먹는 게 아니라더니 과연 그렇다.
된장찌개를 곁들인 식사에 텁텁한 막걸리까지 한 순배 돌고 났다. 무대 위에서 한바탕 놀았던 연주자들이건 객석에서 한바탕 놀았던 관객들이건 구분 없이 70여 명이 하나가 됐다.
참가자들이 깨끗이 비운 밥상을 무르자 식당 방 두 칸을 이어붙인 공간이 그대로 마당이 되고 작은 콘서트장이 됐다. 사물놀이를 이끌던 이광수 명인이 ‘수덕사의 여승’을 ‘땡기’자 고석진이 엿장수 가위 연주로 좌중을 압도했다. 김광석, 장사익, 최선배, 김보라, 오쿠라, 요코자와가 번갈아가며 못다 한 노래와 연주를 들려줬다. 술기운 올라 듣는 질박한 트로트는 프리재즈와 다른 맛을 보여줬다. 이날의 이상한 추모는 마지막까지 그 이상함의 근원인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3·1절 만세삼창도, 곡도 아닌 이런 것으로. “사랑은, 아름답게! 우정은, 길게! 인생은, 즐겁게!… 행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타악-재즈 접목한 거장 김대환의 삶과 기행(奇行) ▼
■ 한국 최초 록그룹 드러머… 프리재즈 서막
“그분은 ‘음악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요.”(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그분 인생을 어떻게 정리해? 몇 시간 취재해서 몇 자 끼적일 거면 쓰지도 마요. 여기 옛날 기사들 있어. 이거 종합해서 대강 마감하든지.”(유재만 ‘아리랑 명품관’ 사장)
5일 오후 만난 유 사장은 20년간 김대환을 후원하며 임종까지 지켰다. 1970년 베트남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에서 사병으로 복무 중이던 유 사장은 당시 한국 위문단장으로 온 김대환을 안내하며 인연을 맺었다. 1985년, 소음 문제 때문에 아무도 연습실을 내주지 않자 초조한 마음에 인사동을 배회하던 김대환과 우연히 해후한 뒤 당시 ‘인사 슈퍼마켓’(지금의 아리랑 명품관 자리) 2층의 작은 공간을 연습 장소로 내줬다. 김대환은 매일 오전 6시 할리 데이비슨을 가게 앞에 세워두고 연습실로 올라와 오후 10시까지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터지도록 북을 두들겼다.
김대환은 ‘최초’와 ‘극단’을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다. 록과 헤비메탈, 국악과 재즈를 넘나들다 결국 뿌리인 타악의 세계로, 소리의 우주로 들어갔다.
1933년 인천에서 태어난 김대환은 1950년대 말 인천 동산고 2학년을 중퇴하고 미8군 무대에서 드러머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신중현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그룹사운드라 불리는 ‘애드포’를 결성했다. 1965년과 66년에는 KBS와 MBC의 전속 악단에서 드럼 스틱을 잡았다. 1970년 신중현의 그룹 ‘퀘션스’에 합류했다. 1971년에는 그룹사운드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조용필도 김대환을 통해 프로 음악계에 입문했다. 김대환이 최이철(‘사랑과 평화’), 조용필과 결성한 ‘김트리오’를 통해서였다.
록의 대부로 자리매김한 그는 미련 없이 록을 떠났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울 계동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강태환(색소폰), 최선배(트럼펫)와 결성한 ‘강트리오’로 10년간 활동하며 한국 프리재즈의 서막을 열었다.
1985년 강태환과 함께 대한해협을 건너가 일본 재즈계에 진출했다. 이 무렵, 한 톨의 쌀알에 직접 만든 도구로 반야심경 전문 283자를 새겨 넣었다. 이 고금에 유례가 없는 세서(細書) 작업은 1990년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연주 활동을 하던 그는 1993년 서울 문화일보홀에서 할리 데이비슨 배기통과 협연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칠순을 바라보던 2000년까지 그는 프랑스 아비뇽국제음악제, 일본 오사카 간사이 페스티벌, 영국 애든버러 국제 재즈 페스티벌 같은 굵직한 국제 행사에 초청됐다. 그는 외국에서도 고집스레 오토바이 투어를 이어간 속도광이었다. 고교 중퇴의 그는 2004년 1월에는 한성대(당시 한완상 총장)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존의 예술적 범주와 틀을 뛰어넘어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소리와 글씨의 영역에서 뼈를 깎는 아픔을 통해 파격적으로 승화시킨 예술인’이라는 게 학위 수여의 변이었다.
2004년 폐렴이 악화돼 입원하고 그해 3월 1일 결국 숨을 거두기 한 달 전까지도 그는 오토바이 헬멧과 여섯 개의 북채를 놓지 않았다. 연습 벌레였던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데 시간을 쏟기 아깝다며 혀끝을 잘라버린 이야기도 유명하다.
유 사장은 “1990년대 중반, 일본 음악가 기타로(‘실크로드’ 등 TV,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인물)와 도쿄 산토리홀에서 연 합동 콘서트는 그의 명연주 중 하나”라며 “수십 대의 신시사이저로 화성의 벽을 쌓은 기타로를 북 한 대를 내세운 원초적 타악으로 압도한 그는 북채를 내려놓고 ‘낙엽귀근(落葉歸根)’이란 서예를 쓰고는 무대를 내려왔다. 화성과 박자의 잎사귀는 화려해 보이지만 음악의 뿌리는 두드림이라는 의미였던 듯하다. 그에게 반한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여 두 시간 동안 사인회를 이어간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김대환은 세 차례 솔로 음반(‘흑우’ ‘묵우’ ‘흑경’)을 냈지만 지금은 모두 절판돼 구하기 힘들다. 진옥섭은 “즉흥이란 말을 너도나도 쓰고 싶어 하는 세상이 됐지만 김대환 선생이 선구한 즉흥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탐내는 즉흥”이라고 했다.
김대환은 숨은 재능을 꿰뚫어보는 데 탁월했다고 지인들은 입을 모은다. 풍물패에서 태평소를 불던 장사익의 음성을 알아보고 ‘산토끼를 불러보라’고 한 뒤 ‘박자를 세지 말고 거기서 자유로워지라’며 개성 있는 보컬리스트로서의 재능을 깨운 일화도 회자된다. 장사익은 “머금지 않고 물을 스쳐 흘려보내고도 난(蘭)이 꽃과 향기를 피워내는 이치처럼 김 선생이 스치듯 던진 한 마디의 무게가 엄청났다”고 했다.
강은일은 “1989년 김덕수 사물놀이 대회에서 제 연주를 듣곤 ‘악기를 들고 날 찾아오라’고 하셨다. 1990년 일본 공연을 함께하고 ‘흑우’라는 음반도 함께 내게 됐다”고 했다. 그는 “대학교 3학년 때 간절히 꿈꾸던 동아 콩쿠르 대상을 받은 뒤 목표를 잃은 상황에서 선생은 신세계를 열어보여 주셨다. ‘음악을 깨라’ ‘해금에서 징 소리를, 색소폰 소리를 내보라’던 그의 일갈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고 했다.
북촌창우극장을 세운 연극연출가 허규(1934∼2000)의 딸인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도 김대환을 통해 음악의 신세계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김 선생을 알게 됐고 강은일이 국악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도 참여하게 됐다. 그는 사물이 통하는 이치를 아는 진정한 예술인이었다”고 돌아봤다.
흑우의 이름 아래 모인 이들은 내년 10주년 추모제를 ‘종일 축제’와 전시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벌써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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