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미군부대 앞에서 45년째 초상화-풍경화 그려온 이재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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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21일 03시 00분


“베리굿, 원더풀…” 미군들이 극찬했던 ‘송탄의 박수근’이 다시 돌아왔다

11세 때 미군이 건네준 새콤달콤한 오렌지주스, 그리고 중학교 때 처음 받아든 유화 물감. 이재형 씨는 그때부터 ‘미군’과 ‘그림’에 빠져 살았다. 40여 년 동안 미군으로부터 주문받은 그림의 세계에서 살아온 이 씨는 이날도 미군이 사진을 건네며 그려달라고 한 벚꽃 그림을 그리러 캔버스 앞에 앉았다. 평택=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1세 때 미군이 건네준 새콤달콤한 오렌지주스, 그리고 중학교 때 처음 받아든 유화 물감. 이재형 씨는 그때부터 ‘미군’과 ‘그림’에 빠져 살았다. 40여 년 동안 미군으로부터 주문받은 그림의 세계에서 살아온 이 씨는 이날도 미군이 사진을 건네며 그려달라고 한 벚꽃 그림을 그리러 캔버스 앞에 앉았다. 평택=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초여름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친 소년은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논두렁으로 몰려갔다. 논밭 주변에는 낡은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정신없이 놀다보니 어느새 파란 눈의 미군들이 다가와 있었다. 미군들은 철조망 너머 막사로 아이들을 끌고 갔다. ‘꼬부랑말’을 하는 그들은 요 며칠 사이 부대로 몰래 들어와 드럼통과 타이어를 훔쳐간 아이를 찾고 있는 듯했다. 부대에서 나오는 건 뭐든지 돈이 되던 시절이었다. 겁에 질린 소년들 중 누구도 자수하고 나서는 아이는 없었다. 한참 만에 그중에는 범인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미군들은 “소리, 소리(sorry, sorry)”라며 노란색 음료수를 쥐여줬다. 》

1960년 봄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경기 평택군 송탄면 서정리국민학교로 전학 온 열한 살 소년 이재형 군은 이렇게 ‘K-55’ 부대와 첫 인연을 맺었다. 소년은 다시는 부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운명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새콤달콤한 맛의 여운이 혀끝에서 맴돌던 음료수를 오렌지주스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소년이 엄마와 누나 손을 잡고 고향 황해도를 떠나 익산에서 피란살이를 하던 1952년, 송탄에 들어선 미 공군기지가 K-55였다. 옆 동네 오산은 기지와 상관이 없었지만 송탄보다 로마자로 표기하기 쉽다는 이유로 ‘오산공군기지’라는 정식 명칭이 붙었다. 그래도 소년에게 이곳은 늘 K-55였다.

소년, 붓을 들다

소년이 유화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 미술부 선생님이 일본에서 원조 받은 유화물감을 선물했다. 수채화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세계였다.

중고등학교 때 미술부를 거치며 소년이 그림에 빠져드는 동안 기지 정문 앞에는 술집과 ‘양공주집’, 식당, 사진관, 잡화상이 빠르게 늘었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기지촌 상권이 만들어진 것이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한국 사람들끼리 사고파는 ‘저녁시장’도 형성됐다. 부대에서 나온 햄과 소시지 버터 치즈로 만든 ‘송탄부대찌개’도 여기서 탄생했다. 미군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방이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남편 없이 피란 와 보따리장사를 하며 자식을 키운 어머니에게 소년은 미대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친구와 함께 송탄에서 이름 난 화가를 무작정 찾아가 제자로 받아 달라고 애원했다.

1969년 스무 살 이재형 씨는 그렇게 화가가 됐다. 새벽같이 화실로 달려가 다음 날 동틀 때까지 그림 그리는 게 일상이었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붓질이 익숙해질 무렵 부대 앞 화방에서 연락이 왔다. 미군이 주문한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다.

‘환쟁이’라고도 불리던 상업화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두려움의 대상이던 미군은 손님이 됐다.

미군은 일상에서 그림을 즐기는 ‘별세계’ 사람들이었다. 먹고살기 바빠 그림 따위 관심 없는 한국인과 달랐다. 계절이 바뀔 때, 숙소 가구를 바꿀 때, 가족이 생각 날 때 그들은 그림을 바꿔 달았다. 부모, 아내, 여자친구의 사진을 갖고 와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했다. 멀리 고향에도 그림을 선물로 보냈다. 장독대, 소달구지 같은 한국적 정취를 담은 풍경화나 세계적 명화의 모작도 인기가 있었다.

미군들이 일제히 고향으로 선물을 부치는 크리스마스 즈음이 가장 큰 대목이었다. 그림을 주문하는 미군 손님들과 손짓발짓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도 어느새 영어가 익숙해졌다. “베리 굿. 원더풀.” 초상화를 받아든 미군이 연신 감탄사를 뱉어낼 때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송탄뿐 아니라 서울 용산, 경기 동두천 파주 등 미군부대가 있는 곳엔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있었다.

삼각지, 수출역군의 산실이 되다

마침 1970년 나이 마흔에 늦깎이 데뷔한 박완서 선생이 소설 ‘나목(裸木)’을 발표했다. 모든 게 부족하고 배고팠던 시절, 물자가 넘쳐나던 용산 미군부대 피엑스(PX)에서 5달러짜리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꾸려가는 소설 속 화가 옥희도는 한국의 대표적 서민화가 박수근이 모델이었다.

이 씨는 더 큰 무대 용산을 향해 1972년 짐을 꾸렸다. 그가 새로 정착한 곳은 용산구 한강로1가 일명 ‘삼각지’였다. 미군기지 동쪽의 이태원에 미군이 여가활동을 즐기는 유흥업소와 상점이 줄지어 들어섰다면 서쪽의 삼각지는 미군 초상화를 그리는 화실이 몰려 있어 ‘삼각지 화랑거리’로 불렸다.

전국에서 손재주 있는 화가들이 모여들면서 삼각지는 미군 초상화 시장에서 해외로 그림을 수출하는 산실이 됐다. 수십 명의 화가를 두고 그림을 수출하는 업체도 생겼다. 그들이 그린 명화 모작과 풍경화 정물화 동물화 종교화는 일본 미국 유럽 중동까지 팔려나갔다.

이 씨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화실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그림을 그리며 ‘수출역군’이 됐다. 공무원 월급이 3만 원, 대학교수 월급이 6만 원이던 시절, 이 씨는 한 달에 25만 원을 벌었다. 베테랑 선배들의 월수입은 50만 원을 넘었다. 남부러울 게 없었다. 1990년대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대량생산된 중국산 그림에 밀리기 전까지 삼각지엔 많을 땐 2000명의 화가가 있었다.

“익스큐즈 미.” 1975년 어느 날 미대사관 소속 군인 앤더슨이 찾아와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몇 번의 퇴짜 끝에 이 씨는 앤더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주일에 두 번 앤더슨은 대사관에서 퇴근하는 길에 준외교관 번호판이 달린 차로 이 씨를 모셔갔다. 그의 집은 용산기지 내 사우스포스트에 있었다. 잘 손질된 넓은 공원, 깔끔하고 조용한 주택단지. 담 하나만 넘었을 뿐인데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처음에는 레슨비를 받았지만 어느새 정이 쌓이면서 돈을 받지 않게 됐다. 그 대신 앤더슨은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고급 유화물감과 붓을 챙겨다 줬다. 앤더슨의 소개로 이 씨는 미군 위문활동을 하는 미군위문협회(USO)에 초대돼 난생 처음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미군기지의 흥망성쇠를 그리다

1978년 다시 돌아온 송탄은 ‘경기도 이태원’이었다. 아니, 이태원보다 더 화려하고 숨 가빴다.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까지 전세기를 타고 송탄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해외 주둔 미군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항공편이 있었고 K-55기지에서 이착륙을 했다.

‘먹고 놀기도 좋고, 싼값에 질 좋은 물건을 쇼핑할 수 있다’는 소문이 미군들 사이에 퍼지면서 주말이면 송탄은 아시아 주둔 미군의 집결지가 됐다. 기지 정문 앞 수백 m 길을 따라 영어 간판을 단 상점이 빼곡히 들어섰고, 돈을 번 사람들은 판잣집과 단층건물을 헐고 3, 4층짜리 ‘고층건물’을 잇달아 올렸다. 1981년 송탄이 시로 승격되면서 신장리도 신장동으로 바뀌었다. 미군들은 이곳을 ‘신장 쇼핑몰’이라고 불렀다.

송탄에서 활동하는 화가들도 어느새 7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 씨는 삼각지를 다녀온 베테랑 화가로 통했다. 모나리자 갤러리, 럭키 갤러리를 오가며 점심 먹을 틈도 없이 밀려오는 주문을 소화했다. 퇴근길에는 미군 친구들과 어울려 클럽을 들르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신장 쇼핑몰의 화려한 불빛은 1990년대 들어 서서히 꺼져갔다.

비싼 그림도 척척 사가던 ‘돈 많은’ 미군이 사라지고 독특한 억양에 구릿빛 피부의 미군이 갤러리를 드나들었다. 1973년 미군이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뀐 뒤 영주권을 따기 위해 입대한 타국 출신 미군들이었다.

가난한 미군이 늘어난 데다 K-55기지를 오가던 무료 항공기마저 끊기면서 송탄 경제는 빠르게 쇠락했다. 1995년 평택시와 통합돼 송탄시라는 지명도 사라졌다.

1998년 이 씨는 다시 짐을 쌌다. 이번엔 미국 캘리포니아 휴양도시 팜스프링스에서 갤러리를 연 지인의 초청이었다. 비자 문제로 6개월마다 한국을 오가며 그는 미국에서 붓을 잡았다. 똑같은 그림을 그려도 한국보다 3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하루는 백발의 노신사가 이 씨의 풍경화를 사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림에 감동했다”며 함께 사진도 찍자고 했다. 영화제작사 워너브러더스의 사장이었다. 처음 온 손님들도 꼬박꼬박 그에게 ‘서(sir)’라는 깍듯한 존칭을 썼다. ‘이발소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를 천대하는 한국과 달리 그를 어엿한 아티스트로 인정하는 미국 문화가 마음에 들었다.

2001년 9·11테러가 터지자 이 씨는 고향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한 달 뒤 그는 미국생활을 정리했다.

마지막 남은 ‘환쟁이’

평택국제중앙시장. 전쟁과 함께 송탄에 주둔한 K-55 부대 인근에는 술집, 식당, 사진관과 함께 화방이 들어섰고, 이 거대한 상권은 여전히 시장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평택=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평택국제중앙시장. 전쟁과 함께 송탄에 주둔한 K-55 부대 인근에는 술집, 식당, 사진관과 함께 화방이 들어섰고, 이 거대한 상권은 여전히 시장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평택=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송탄의 그 많던 화방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지금 K-55기지 앞에는 갤러리가 5곳만 남아 있다. 활동하는 화가는 10명 미만. 상업화가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없다 보니 50대 후반이 막내다. 이 씨는 2006년 선배가 운영하던 ‘블루보이 갤러리’를 넘겨받아 사장 명함을 찍었다.

화려했던 신장 쇼핑몰과 저녁시장은 평택국제중앙시장이라고 불린다. 여전히 한국인 손님보다 외국인이 더 많고 영어 간판을 내건 가게에서는 달러화가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큰 변화라면 미군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인과 중국인이 자주 눈에 띈다는 점. 지난해 정부 지정 ‘국제명소시장’이 된 뒤로 한국인도 부쩍 늘었다.

시장 명소인 기찻길엔 지금도 K-55부대로 군 물품을 실어 나르는 기차가 다닌다. 하지만 1970, 80년대 화려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 씨에겐 황혼의 늙은 도시인 것만 같다. 마치 그 자신처럼.

2016년이면 용산 미군기지와 경기 북부의 미 2사단이 평택으로 이전한다. 20대의 이 씨가 대처(大處)라며 향했던 용산 기지가 이제는 그의 곁으로 오는 것이다. 이태원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들 중엔 벌써 평택국제중앙시장에 분점을 낸 사람도 있다.

황혼이 깃든 도시에 다시 새벽 해가 떠오를까. 마지막 남은 송탄 ‘박수근’들의 명맥을 누군가가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이 씨는 오늘도 붓을 잡는다.

평택=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이재형#송탄#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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