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신용회복위원회에 사전채무조정(프리워크아웃)을 신청했던 김모 씨(42)는 25일 장기연체자의 빚을 절반까지 깎아주는 내용이 담긴 국민행복기금 추진 방안 발표를 듣고 분통을 터뜨렸다. 카드빚 4000만 원을 두 달간 연체했던 그는 채무조정을 거쳐 연체이자 200만 원을 포함한 4200만 원을 10년간 나눠 갚고 있다.
연체 기간 1개월 이상 3개월 미만인 연체자를 대상으로 하는 신용회복위의 프리워크아웃 대상자는 원금 감면 혜택을 받지 못한다. 또 기존 신용회복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번 국민행복기금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김 씨는 “빚 안 갚고 더 오래 버틴 사람만 원금을 깎아주는 게 말이 되느냐. 못 버틴 내가 바보였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국민행복기금의 세부 내용이 공개됨에 따라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이들에 대한 역(逆)차별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번에 대상에서 제외된 이들도 “기다리면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를 갖게 돼 채무 상환과 관련한 도덕적 해이가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날 정부는 재산이 있는 사람에겐 재산 가치를 넘는 빚만 감면해주고, 나중에 재산을 숨겨놓은 게 드러나면 채무조정 약정을 취소하는 등 관련 대비책을 내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정도 대책으론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LG경제연구원의 조영무 책임연구원은 “재산을 숨기다가 드러났을 때 받는 불이익이 채무조정 무효화 정도라면 많은 이가 재산을 숨기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추가 탕감을 기대하며 빚을 갚지 않는 ‘버티기 채무자’가 늘어날 우려도 적지 않다. 한 시중은행의 여신 담당 부행장은 “이번에 정부가 2월 말 현재 6개월 이상 연체한 사람으로 채무조정 대상을 한정했지만 현장에서는 1, 2번 정도 더 빚 탕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우려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도 “심각한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행복기금을 조성하는 것 자체는 찬성한다”면서도 “하지만 원금 탕감 기준을 명확하게 세워 대상자를 선별하지 않으면 재정에 부담만 주는 실패한 정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