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국을 배제한 북-미 대화로는 북핵 위협을 포함한 북한 문제를 풀 수 없다고 깨닫고 대(對)한반도 정책을 한국 중심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처절한 자기반성의 결과다. 세 차례의 북-미 고위급 회담을 어렵게 이어 가며 타결한 지난해 ‘2·29 합의’의 실패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경험을 통해 ‘미국이 북-미 양자 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자각을 했다는 것이 한미 고위 당국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북한은 남한을 미국과 거래하기 위한 통과 의례 정도로만 여기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술을 일관되게 써 왔다. 이에 질색한 미국이 ‘한국과 통하지 않고는 북한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통남봉북(通南封北)’ 의지를 확고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3일 미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미 직접 대화 가능성을 묻자 “우리(미국)는 (북핵 문제의) 유일한 당사자가 아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선 분명히 한국, 중국 등 6자회담 당사국이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29 합의 처절한 실패와 깨달음
2·29합의는 북한의 위협→협상→도발로 이어지는 잘못된 패턴에 미국이 말려든 사건이다. 이 합의에서 북한은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을 중단하고 장거리미사일 시험 발사와 핵실험을 유예(모라토리엄)하는 대가로 24만 t이라는 미국의 대규모 식량 지원을 약속받았다.
미국은 지난해 4월과 8월에도 한국과 별다른 협의 없이 고위 당국자를 비밀리에 북한에 파견해 별도의 협상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의 핵심 관계자는 “한국은 철저히 소외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북한의 잇따른 도발로 2·29 합의가 휴지 조각이 되자 워싱턴 정가에서 대북 협상파의 설 자리가 사라졌다. 2·29 합의 때만 해도 대화론자로 북-미 대화를 주도한 미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이달 7일 미 상원 청문회에서 “대화를 위한 대화에 응하지 않겠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북-미 관계도 개선될 수 없다는 점을 북한에 분명히 알렸다”고 밝혔다.
○ 대북 정책의 주도권을 얻은 한국
미국의 고위 당국자는 최근 한국 인사를 만난 자리에서 “남북 관계가 경색되더라도 인도적 지원과 대화 창구를 열어 놔야 한다는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환영하고 한국이 대북 정책의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이런 전폭적인 한국 지지는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과의 패권 다툼이 날로 가열될 개연성이 커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정부 당국은 보고 있다. 한국 정부의 당국자들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중심이 ‘북-미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의 문제에서 ‘한미 관계를 어떻게 더 굳건히 할 것이냐’의 문제로 옮겨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주도적으로 남북 관계 개선과 비핵화 정책을 추진할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통남봉북’ 태도를 북한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박근혜 정부가 최근 북한의 도발 위협에도 ‘일정 기간 북한이 자제하면 대북 인도적 지원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이런 기류를 반영한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현 상황을 관리하면서 대화의 물꼬를 트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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