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 삼성전자 실적 발표장. 이명진 삼성전자 IR팀장은 “올해 원화 강세로 인한 영업이익 감소분이 3조 원을 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환율 변동으로 본 손해는 지난해 3분기(7∼9월) 5700억 원, 4분기(10∼12월) 3600억 원이었다.
삼성전자보다 하루 먼저 열린 현대자동차 실적 콘퍼런스콜에서도 환율 이야기가 나왔다. 이원희 현대차 재경본부장은 “올해 하반기(7∼12월)로 갈수록 원화가 더 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며 “환율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 중이지만 강세가 계속되면 수익성 악화는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대표 수출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실적 발표장에서 환율에 따른 이익감소 규모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을 보면, 올해 환율 리스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환율 변동 위협에는 중소기업이 훨씬 더 크게 노출돼 있지만 대기업 역시 ‘환율 공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원화 강세와 엔화 약세 현상이 지속되면 올해 한국 제조업 전체의 영업이익은 무려 23조2000억∼40조3000억 원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 “올해 한국경제 불안의 최대 뇌관”
국내 및 해외 대형 조선업체에 부품을 납품하는 A기업은 연초부터 손해를 감수하며 수출하고 있다. 올해 들어 원-달러 환율이 한때 1050∼1060원 수준으로 떨어져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것이다.
이 기업 관계자는 “업황이 좋을 때는 환차손만큼 납품 단가를 올려 피해를 줄이곤 했는데 요즘엔 업황도 안 좋아 단가 인상 얘기는 꺼낼 수도 없다”며 “일부 거래처는 한국 부품의 가격이 오르면 중국으로 거래처를 옮기겠다고 ‘협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와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원고(高)·엔저(低)가 추가로 진행되는 시나리오를 세 가지로 나눠 한국 제조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세 가지 시나리오는 △시나리오1(원-달러 1000원·엔-달러 100엔) △시나리오2(원-달러 950원·엔-달러 110엔) △시나리오3(원-달러 900원·엔-달러 120엔) 등이다.
시나리오1에서는 올해 한국 제조업의 영업이익이 23조2000억 원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원고·엔저가 심화되는 시나리오2와 시나리오3에서는 각각 31조9000억 원, 40조3000억 원의 영업이익이 증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원화 강세와 엔화 약세 현상이 지속될 경우 조선과 자동차산업의 영업이익률이 눈에 띄게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조선은 시나리오1 상황에서 현재 5.9%인 영업이익률이 ―2.8%까지 하락해 적자로 돌아선다. 약 7조3000억 원의 영업이익이 환율 때문에 사라지는 셈이다.
자동차는 적자로 바뀌지는 않지만 영업이익률이 7.8%에서 절반 이하인 3.7%로 떨어진다. 최악의 상황인 시나리오3에서 자동차 업종의 영업이익률은 0.7% 수준까지 주저앉는다. 전기 및 전자기기 산업도 시나리오1에서 영업이익률이 3.4%포인트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약 15조 원의 영업이익이 줄어드는 것이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김진성 거시분석실장은 “글로벌 수요가 본격적으로 회복되지 못한 가운데 원고·엔저 추세가 심화되면 이는 올해 한국 경제 불안의 최대 뇌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연초부터 뒤바뀐 한일 기업 희비
환율 변동에 따른 기업의 공포가 가장 먼저 느껴지는 곳은 주식시장이다. 원고·엔저의 타격을 가장 많이 받을 것으로 꼽히는 자동차업계는 연초부터 엔저의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고 있다.
실제로 올해 1분기(1∼3월) 세계 주요 완성차업체 중 현대차와 기아차의 주가가 가장 부진했다. 연초 이후 현대차 주가는 25일 종가 기준으로 1.4%, 기아차는 1.6% 하락했다. 반면 같은 기간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22.8%, 혼다자동차는 16.9%나 올랐다.
기업 현장에서도 엔화 약세의 악영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한국무역협회가 수출기업 789곳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17.4%는 ‘엔화 약세로 인해 수출경쟁력이 악화된다’라고 답했고 23.6%는 ‘원래 일본 기업과 경쟁이 적었지만 엔화 약세로 새로운 경쟁구도가 생길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한일 간 수출경합도가 과거보다 높아진 상황을 고려할 때 엔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은 수출 기업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원고·엔저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던 2005∼2007년 당시, 해당 기간 월평균 수출 증가율은 13.5%로 매우 높았지만 제조업 수출 기업의 영업이익 증가율은 2005, 2006년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고려대 오정근 교수는 “엔저 현상이 지속되면 일본과 수출 품목이 많이 겹치는 일부 산업은 수출경쟁력이 크게 약화돼 실적이 부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환율 변동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는 정부도 최근 환율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산업계의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달 초 KOTRA는 ‘엔저비상종합대책’을 수립해 엔저에 따른 수출 기업의 경쟁력 저하를 막겠다고 밝혔다. KOTRA의 최현필 선진시장팀장은 “일본 현지에 공동물류센터를 설립하는 등 한국 기업의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여러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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