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주도할 ‘키-디플로머시(KI)’의 핵심 전제는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이다. 미국은 20년 가까이 북한과 핵 협상을 진행해온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북한이 핵 협상의 유일한 상대로 여기는 국가다. 이 때문에 한국이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행사하며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의 패턴대로 미국을 잘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 “미국은 너무 피곤하다”
워싱턴과 서울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북핵 문제에 대해 극심한 피로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미국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시작으로 베를린과 제네바 등에서 수많은 북-미 양자회담을 진행해왔다. 2003년부터는 6자회담을 비롯한 여러 다자 협상을 통해 북한을 어르고 달랬다. 방코델타아시아(BDA)식 금융제재를 동원해 북한에 채찍을 들이대기도 했고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앞세워 북한의 태도 변화를 압박해 보기도 했다.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워싱턴에서 대북 비둘기파는 거의 고사(枯死)했다. 이들이 북한 관련 세미나를 열려고 해도 후원금조차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외면당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간신히 이끌어냈던 ‘2·29 북-미 합의’ 직후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는 그나마 남아있던 이들의 입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타였다.
전문가들은 이런 미국 내의 흐름이 역설적으로 한국의 대북정책 주도권 행사에 탄력을 불어넣는 환경을 만들어줬다고 보고 있다. 신기욱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 소장은 “북핵 문제는 미국에 여전히 중요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다 보니 이제 한국이 해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이 당장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정치적 공간을 마련해 놓으면 여기에 미국이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협상의 동력을 회복해나갈 수 있는 구도가 절실하다는 설명이다. ○ “美가 따라올 길을 한국이 개척해야”
정부는 우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1단계부터 가동해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남북 관계 개선을 꾀할 방침이다. 북한의 핵개발과 연이은 고강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1단계인 대북 인도적 지원을 시작하고 이어 호혜적 협력사업(조림사업, 개성공단 등)의 인프라 지원 및 남북 경제협력 확대를 진행시키면서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낸다는 복안이다. 이를 통해 신뢰가 충분히 쌓이면 비핵화까지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초반 경색 국면을 풀 카드로 정부의 대북특사 파견 등도 거론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27일 외교부와 통일부 업무보고에 앞서 모두발언에서 “서두르지 말고 벽돌을 하나하나 쌓듯이 신뢰를 바탕으로 남북 관계를 차근차근 발전시키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미국 의회와 행정부 내의 대북 강경파가 한국의 이런 정책 이행 과정에 제동을 걸 가능성이다. 일부 강경파는 미국 본토를 타격하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막기 위해 선제타격 같은 극단적인 군사적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벌써부터 북한 문제에 대한 미국의 리더십 약화가 부를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로버트 조지프 전 미 국무부 차관은 이달 7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가 개최한 청문회에 나와 “과거 북핵 문제에 대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대북정책이 성공하려면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 유화책을 추진하다 강경파 중심이던 미국과의 정책 엇박자로 양국 간 동맹 관계까지 흔들린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미 측에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충분히 이해시키고 이행 단계별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이는 북한이 오판하지 않고 남한을 진지한 협상 파트너로 대하도록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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