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팬이 많기로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제작사가 새로운 극장판 ‘에반게리온: Q’(한국은 25일 개봉)를 홍보하기 위해 지난해 6월 희한한 이벤트를 공지했다. 프랑스 미국 중국 일본에 짧게는 2일, 길게는 한 달 동안 각각 홍보부스를 만들 테니 이곳들을 모두 찾아가 도장을 받아오면 상품을 주겠다는 것. 상품이 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농담처럼 들리는 이 이벤트에 세계 에반게리온 팬들이 진지하게 도전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한 팀이 성공했는데 한국의 동갑내기 친구 박현복 씨(30)와 이종호 씨다. 두 사람은 그 과정을 ‘에바로드’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었고 몇 차례 상영회를 열었다. 가정형편도, 주머니 사정도 어려웠던 이들이 영상편집기술과 작곡법을 배워가며 만든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미쳤구나’라는 한숨이 나오다가 막판에는 야릇한 감동에 휩싸이게 된다.
방구석에 틀어박히고 싶었는데
두 사람은 같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점이나 에반게리온 팬이라는 점 외에도 공통점이 많다. 둘 다 결손가정 출신이고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을 중퇴했으며, 대학 중퇴 전까지는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꿨다. 박 씨는 작은 영상제작회사 직원, 이 씨는 중소 정보기술(IT) 기업 프로그래머다.
박 씨는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꿈을 버릴 수 없어 들어간 군소 콘텐츠회사에서는 너무 혹사를 당했다.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나 회사를 다니나 버는 돈이 비슷해 회사를 그만두고 배달 일을 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부려먹기만 하는 사장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 씨는 “이민을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회사를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야간대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이런다고 한국에서 내 삶이 더 나아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두 사람은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에 참여한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우리 정말 미쳤구나”라며 자조한다.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들이 흔히 하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는 답에 비하면 박 씨와 이 씨의 설명은 담백했다. “어렸을 때는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걱정이었는데, 바쁘게 살다 보니까 하나씩 잃게 되더라. 거기에 반항을 하고 싶었다.”(이 씨) “내 앞에 뭐가 보이진 않고 방구석에 들어가고 싶기만 한데, 탈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박 씨) 두 사람은 유럽 여행 한번 가본 적이 없었다. 20대를 고생만 하며 보냈는데, 30대를 앞두고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 여기자.
중고 카메라 들고 주말에 랠리
기왕 하는 거 그래도 생산적으로 하고 싶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고, 약속 차원에서 둘만의 기획서도 만들었다. 기획서에는 ‘30분 분량으로 만든다’고 적었는데 나중에 42분으로 늘어났다. 카메라는 처음에는 빌렸다가 나중에 중고품을 한 대 샀다.
“에반게리온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휴가를 네 차례 내겠다”고 말할 수는 없는 형편이라 주말을 이용해 그야말로 해당 국가를 ‘찍고’ 돌아왔다. 금요일에 프랑스로 출국했다가 월요일 아침에 귀국해 회사로 출근하는 식이었다. 태풍으로 비행기가 제때 못 뜨거나 여행 중 장염에 걸리기도 하고, 중국행 비행기표를 사놨는데 중-일관계 악화로 영화사가 중국 일정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하염없이 재공지를 기다리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돈이었다. 다큐멘터리 후반작업 중 박 씨는 한때 통장계좌에 잔액이 달랑 6원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다큐멘터리 제작 취지를 설명하고 모금을 했더니 에반게리온 팬들이 후원금을 보내왔다. 박 씨는 “목표액을 넘는 돈을 받고 응원 메일도 많이 받았다”며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게 아니구나 싶어 고마웠다”고 말했다.
중-일관계 악화 때문에 일본의 팬들이 중국행을 포기하는 바람에 결국 4개국 완주는 박 씨와 이 씨만 해낼 수 있었다. 마지막 행사장에서는 두 사람이 랠리를 완주한 것을 알아본 중국의 에반게리온 팬 100여 명이 도장 찍은 종이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자며 몰려드는 바람에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라던 이 씨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두 사람 정말 행복해 보여요”
그렇게 촬영한 분량은 60시간이 넘었다. 행사장에서 만난 다른 나라의 에반게리온 팬들 이야기, 두 사람을 보는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 ‘우리가 이걸 도대체 왜 하는 걸까’라는 계속되는 질문과 자답이 담겼다. 후반작업을 하는 한 달 정도는 거의 매일 밤을 새웠다. 초고화질(풀HD) 영상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는 완성도가 너무 높아 기이할 지경이다. 악보도 못 읽는 사람들이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을 만들고 CD까지 냈다.
7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시사회를 열고 난 뒤에는 감동받았다는 관객들의 e메일이 답지했다. ‘두 사람이 정말 행복해 보인다, 나도 좋아하던 일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내용들이었다. 11일 서울 마포구 당인동에서 열린 추가 상영회에 참여한 일본인 사쿠라이 시오리 씨(29·여·연세대 어학당)는 “한국에 이 정도 오타쿠가 있을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윤동열 씨(30·시나리오 작가)는 “영화제작 관련 미팅을 갔다가 이런 다큐멘터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보러 왔다”면서 “일단은 재미있고, ‘쓸데없이 고퀄리티’라는 말이 나올 만큼 수준이 높다”며 웃었다.
당사자 두 사람의 태도는 랠리 뒤에 바뀌었을까. “후련하고 홀가분하고…, 아직 실감이 안 난다.”(박 씨) “여전히 이민을 가고 싶긴 한데…, 그냥 이렇게 재미있게 살아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이 씨)
에반게리온 제작사가 나중에 공개한 상품은 ‘4개국 중 한 나라에 갈 수 있는 항공권 및 숙박권이나 원작자가 직접 그린 캐릭터 그림 중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두 친구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했다.
▼ ‘에반게리온: Q’ 25일 한국 개봉… 18년째 시리즈 인기 비결은▼ ■ 염세-자폐적인 ‘이상한 로봇만화’ 내성적 한일청년들 “내 얘기 같다”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특별하고 이상한 작품이다. 도시에 불쑥 나타나는 거대 괴수를 소년소녀가 조종하는 거대 로봇이 막는다는 유치하고 뻔한 설정에, 애니메이션 작품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난해한 메시지와 염세적이고 자폐적인 분위기가 뒤섞여 있다.
1995년 시작한 이 시리즈가 지금까지 거둬들인 총수입은 1500억 엔(약 1조7000억 원)으로 추산된다. 25일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에반게리온: Q’는 일본에서 53억 엔(약 600억 원)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열혈 팬들이 20년 가까이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서태지와 닮았다. 청소년기에 에반게리온을 접한 팬들은 중년이 되어서도 꾸준히 관련 상품을 사고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극장을 찾는다.
우울하기 짝이 없고,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도 없는 이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이런 인기를 누리는 걸까. 팬들 중에는 “내 이야기 같아서”라는 답을 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남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전투를 겁내지만 한편으로는 선택된 영웅이고 주변에 미녀가 많은 주인공을 보며 동질감과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얘기다.
‘에반게리온: Q’ 명예홍보대사인 정다운 씨(19·대학 휴학 중)는 “기본적으로 내성적인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라며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고 주변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주인공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며 봤다”고 말했다. 회원 수 1만4000여 명인 네이버 에반게리온 카페의 운영진 진기범 씨(24·만화가 지망생)는 에반게리온이 “입시지옥을 겪으며 부모로부터 획일적인 목표를 강요당하는 일본과 한국 청소년에게 특별히 어필한다”고 평가했다.
‘오타쿠들이 오타쿠를 위해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에반게리온 블로그를 운영하는 김유니아 씨(29·문화센터 강사)는 “이런저런 해석을 할 수 있게 내용이 모호해 오히려 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게 에반게리온의 매력”이라고 분석했다. 에반게리온 해설서인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2012·영상노트)을 번역한 곽형준 씨(31·번역가)는 “해석할 여지를 많이 남겨 팬들에게 ‘갖고 놀 거리’를 주는 작품”이라며 “감독이 일부러 내용을 얼버무린 뒤 나중에 설정을 덧붙이기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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