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월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대기업인 A사 마케팅부서 회의실. 팀장이 속사포처럼 지시사항을 쏟아냈다. 팀원들은 수첩에 받아 적기에 바빴다. 이 회사의 김모 대리(33)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려면 여러 의견이 쏟아져야 하는데 윗사람 의견에 토씨도 달 수 없는 분위기”라며 “침묵하는 게 상책”이라고 털어놨다.
#2. 올해 8월 졸업을 앞둔 취업 준비생 양모 씨(23). 소위 명문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학교 선배가 창업한 벤처회사에서 일하겠다는 뜻을 부모에게 밝혔다가 얼굴만 붉혔다. 양 씨의 부모는 “탄탄한 인생이 보장되는 대기업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하려 하느냐”며 펄쩍 뛰었다. 결국 양 씨는 ‘대기업 입사 고시’ 준비를 하기로 했다.
박근혜정부가 ‘창조경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경제·사회·문화 인프라가 창조경제의 걸림돌인 것으로 나타났다.
○ ‘시키는 대로’ 문화가 창의력 막아
21일 동아일보와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젊은이들이 창조적 역량을 계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입시 위주의 교육 문화’(51.7%)와 ‘장기적 취업난으로 인해 도전에 소극적인 문화’(26.7%), ‘상명하복의 기업문화’(12.0%) 순으로 많았다.
전문가들은 획일화된 여건이나 제도에서 창조경제의 성장 동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장우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창의력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길러지지만 한국은 정답을 맞히는 요령을 기르는 교육 체계“라고 꼬집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후츠파 정신(대담함)’에 힘입어 창조경제를 꽃피우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스라엘에선 상명하복의 대명사인 군대에서조차 ‘계급장을 떼고’ 자기 의견을 밝히는 문화가 당연시되고 있다.
○ 도전보다 안전 권하는 사회
벤처 기피 문화는 각종 통계로도 나타난다. 2012년 벤처기업 실태조사에서 20, 30대 창업은 2011년 19.5%로 2000년(54.5%)의 반 토막 미만으로 쪼그라들었다.
한 대학교수는 “미국에선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 등 상위권 대학 출신의 ‘엘리트 창업’이 적지 않지만 한국은 사회 전체가 젊은이들의 창업을 말리는 분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는 실패를 용인하지 못하는 문화와 무관치 않다. 응답자 중 90.3%는 ‘벤처에 성공하려면 적어도 세 차례 이상 실패해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응답자의 74.6%는 ‘벤처에 실패한 후 재기하는 게 어렵다’고 답했다.
벤처 창업이 쉽지 않은 풍토도 창조경제의 기를 꺾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이 벤처 창업에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중 46.6%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들은 벤처 창업이 어려운 이유로 ‘담보 대출 위주의 금융제도’(41.4%)와 ‘인수합병(M&A) 규제’(28.7%)를 꼽았다.
금융계 관계자는 “투자손실이나 부실대출에 대한 금융당국 등의 빡빡한 잣대도 문제”라며 “벤처 투자는 10곳 중 한 곳만 대박이 나도 성공한 것인데 이 기관들은 실패한 아홉 곳의 책임을 묻는다”며 금융지원이 소극적인 이유를 설명했다.
또 한국은 M&A 규제가 심해 구글과 페이스북 등이 유망한 벤처기업을 거액에 인수하며 청년 창업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
○ 창의적 아이디어 받아줄 시장 키워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사업화할 수 있는 생태계가 취약한 점도 문제로 꼽힌다.
장석인 산업연구원 산업경제연구센터 소장은 “대기업들은 필요한 물품이나 기술을 계열사에서 조달한다”며 “한국은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도전해볼 시장이 극히 좁다”고 말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정부가 특정 산업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것보다 과감한 규제 완화 등으로 창조경제의 아이템을 소화할 만한 시장을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벤처에 해외 자본의 투자를 이끌어 내거나 벤처의 해외 진출을 육성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경영학)는 “구글 등 잘나가는 외국기업들은 이스라엘 벤처에 투자하며 판매처까지 마련해준다”며 “한국도 해외 교포들을 글로벌 창업의 지원군으로 활용할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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