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직후인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방미(訪美)에 앞서 일본에 들러 이케다 총리 등 일본 고위 정객들을 만난다. 총리관저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서 박 의장은 일본인들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선배님들”이라고 불러 그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선배님들, 우릴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릴 키워 주시오. 그리고 청구권 같은 문제 신경 쓰지 마시오.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이오. 우린 우리 힘으로 경제를 일으키겠소. 하지만 한국이란 자동차가 발동할 때 뒤에서 조금만 밀어주면 고맙겠소.”
당시 자리에 참석했던 기시 전 총리는 물론 이케다 총리까지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고 박 의장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쿠데타의 주역이라 호골(虎骨)인줄 알았더니 겸손하고 상식적이다.” “명치유신 때의 의사(義士)를 보는 것 같다. (박 의장은) 겉은 예의바르지만 속은 알찬 무서운 지도자다.”
위의 일화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이동원 전 외무장관이 펴낸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전 장관은 당시 만남이 이승만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지지부진해 꺼져가던 한일회담이란 장작에 다시 불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박정희 의장은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라는 아슬아슬한 차로 간신히 이기며 당선된다. 호남평야를 휩쓴 대가뭄에다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미국이 농산물 원조까지 중단해버리는 바람에 백성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며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던 해에 치른, 박 의장으로서는 참으로 힘든 선거였다.
박 의장은 결국 비상수단으로 일본에 밀사를 보내 일본종합상사를 통해 캐나다로부터 소맥 10만 t을 긴급 도입해 밀가루로 만들어 수재민 구호 명분으로 남부 지방 수재민과 도시 서민들에게 무상 배포했다. 이 때문에 5대 대통령 임기 내내 야당으로부터 ‘밀가루 대통령’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박 의장은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가장 시급한 것이 ‘경제’였지만 돈이 없었다.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만이 살길이란 것을 통감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도와주고 있다고는 해도 원조 액수를 배로 늘려줄 리도 없고 또 언제까지 원조를 해줄지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일본한테는 우리가 당당히 받아 낼 돈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반일(反日)감정이니 굴욕이니 하며 망가뜨리는 일은 대단한 국가적 손실이다. 너무 감정만 앞세우면 안 된다. 일본이 미국에 머리 숙이고 배웠듯 우리도 그런 자세로 배워야 한다. 게다가 가장 가까운 이웃이 으르렁거리기만 하면 둘 다 손해다. 아무튼 빈곤 추방이란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선 한일회담이란 역사의 틀에 순응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이런 생각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지식인이고 일반 시민들이고 할 것 없이 일본이라면 치를 떨었던 시절이다. 모두들 식민지 시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1964년 2월 28일부터 3월 4일까지 연달아 기자회견과 대변인 발표를 통해 그동안 비밀리에 추진해 오던 한일회담을 3∼5월 중에 타결, 조인, 비준을 한꺼번에 마치겠다고 발표했다. 각계 원로들은 물론 야당과 학생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64년과 65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일회담’ 이슈가 드디어 폭발한 것이다. 64년 4월 잡지 사상계에 실린 지식인들의 반응이다.(괄호 안은 당시 직함)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나는 현 정권 담당자들의 양심을 믿고 싶다.”(김옥길·이화여대 총장)
“일본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한국에 대한 그들의 ‘우호적인 태도’를 믿을 수 없다.”(김준엽·당시 고려대 교수·훗날 고려대 총장)
“일인(日人)들의 경제침략이 과거 우리가 경험했던 그런 쓰라린 것이 되지 않을까 매우 우려된다.”(유치진·극작가·한국연극연구소 소장)
3월 6일 야당,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200여 명은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한편, 이동원 전 장관은 시위가 확대된 배경에는 한일회담의 진행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의 오만이 국민감정을 건드렸던 측면도 크다고 말한다. 다시 그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박 대통령의 ‘고개 숙임’이 ‘굴욕외교’라는 학생데모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지만 거기엔 이후 협상 과정에서 격을 무시한 일본의 외교 행각도 일조했음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측은 외무장관급 이상이 일본까지 날아가 테이블에 앉았지만 일본 측은 외무성 아시아국장이 나오는 등 불평등은 시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학생들로서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공개가 아닌 비밀리에 추진해 왔다는 것도 빌미였다. 뭔가 납득 못할 꿀리는 게 있으니 ‘김종필-오히라 메모’(62년) 같은 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런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6·3사태’까지 발전했다.”
김지하는 1963년 2월 다시 휴학을 하고 원주에서 두문불출했다. 당시 유일하게 그를 구원해 주었던 것은 그림과 종교(가톨릭)였다. 그는 원주의 한 다방에서 시화전을 열고 가톨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밤을 새워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구원에 대해. 그리고 사회의 변혁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 토론하고 토론했다. 그의 말이다.
“그때 사람들로부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가톨릭에 귀의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만큼 나는 영성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김지하는 유물론자가 아니다. 젊은 나이에 우주나 영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절대 유물론자가 될 수 없다. 그러니 괴로움이 많을 것이다. 일찌감치 신에게 귀의하는 길을 찾으라.’”
세상과 잠시 절연하여 꼼짝하지 않았던 그 시기를 김지하는 “돌이켜보니, 인생에서 몇 번 경험해 보지 않았던 긴 휴가와도 같았던 시간”이라고 회고한다.
하지만 그의 생에 잠시 찾아온 휴식은 길지 않았다. 3월이 되자 정치투쟁이라는 큰 물결 한가운데 서게 되니 바로 제3공화국을 출발부터 뒤흔든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였다.
마침내 1964년 3월 24일 서울 시내 대학가에서는 4·19 이후 가장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그로부터 2개월여를 넘긴 6월 3일, 서울 시내에 4개 사단 병력이 투입된 계엄령이 내려져 시위대가 무력 진압되는 ‘(1차) 6·3’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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