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일 오후 5시. 이승태 군(8)을 태운 태권도장 통학차가 경기지역 한 어린이공원 앞 주택가 도로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이 군은 차 앞쪽으로 걸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반대편 차로를 살폈다. 다가오는 차가 없었다.
안심하고 달려서 길을 건너려는 순간 ‘쿵!’. 왼쪽에서 가해진 충격과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이 군이 내린 태권도장 차의 뒤에 있던 1t 화물차가 중앙선을 넘어 추월하려다 그대로 이 군을 친 것이다. 이 군의 왼쪽 다리뼈는 산산조각이 났다. 전치 16주 진단이 나왔다. 취재팀이 1일 병원에서 만난 이 군은 정강이 안팎에 강철핀 10개를 꽂고 있었다.
가해 운전자는 아직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경찰이 형사처벌이 가능한 중과실인 중앙선 침범으로 판단하지 않고 안전운전 의무 위반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 군의 아버지는 “아이가 내리는 통학차를 추월하는 건 살인행위나 마찬가지인데 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분노했다.
○ 하차 어린이 향해 ‘빵빵’
도로에서 최우선 보호대상이 되어야 할 통학차가 한국 도로에선 오히려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다. 4일 오후 2시 서울 목동아파트 단지. 왕복 2차로 인도 쪽에 노란색 통학차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멈췄다. 문이 열리자 아이들이 내렸다. 뒤따르던 승용차는 1∼2초 멈칫 하더니 중앙선을 확 넘었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고 있었지만 속도를 높여 통학차를 추월했다.
인근에서 어린이를 태우고 있던 또 다른 통학차가 멈췄다. 멀리서 뒤따라오던 검은색 외제차는 아예 추월하려고 마음을 먹은 듯 진작부터 중앙선을 넘어 내달려왔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대로 통학차를 앞질러갔다.
취재팀은 이날 4시간 동안 서울 목동 일대 아파트 단지와 영도초교, 신목중교 일대를 다니며 통학차 주변을 지나는 차량을 분석했다. 어린이가 승하차 중인 통학차를 20여 대가 추월했다. 두 대는 통학차 승하차 시간이 길다고 느낀 듯 길게 경적을 울려댔다. 조용히, 안전하게 기다려주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이러다 보니 아찔한 장면이 이어졌다. 한 초등생은 통학차 문이 열리자 뛰어내린 뒤 차 앞으로 냅다 뛰었다. 통학차를 따라오던 승용차는 통학차를 느긋하게 추월하려고 중앙선을 넘었다. 그때 앞에서 초등생이 튀어나오자 놀란 운전자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이나 운전자나 잠시 놀란 듯 멈춰 섰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곧 제 갈 길을 갔다.
‘사교육 1번지’ 서울 강남구 대치동도 다르지 않았다. 취재팀이 8일 오후 대치역 사거리 학원 밀집가 일대와 인근 아파트 단지 및 골목을 2시간 동안 확인한 결과 정차한 통학차를 뒤에서 기다려 주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모든 차가 통학차를 추월했다.
○ ‘통학차 안전규정’ 시험 결과… 줄줄이 낙제
운전자들은 통학차 보호규정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취재팀은 8일에서 19일 사이 경북 상주시 교통안전공단 교통안전교육센터에서 열린 안전교육에 참가한 일반 운전자 213명을 대상으로 ‘통학차 안전규정’ 시험을 실시했다. 문제지는 취재팀이 도로교통법에서 관련 조항을 찾아 네 문항으로 구성했다. 어린이가 타고 내릴 때 주변 차가 어떻게 운전해야 하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시험을 치른 운전자들은 운전경력이 짧게는 1, 2년에서 길게는 30년이 넘는 사람도 있었다. 한 운전자는 “30년 넘게 운전한 나한테 뭐 이런 시험을 보라고 하냐”며 코웃음을 쳤다.
성적표는 처참했다. 100점 만점에 평균 45.42점. 네 문제를 모두 맞힌 운전자는 5명. 0점이 15명이었다. 통학차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린이가 타고 내릴 땐 어떻게 주변을 통과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운전자가 40명 중 1명꼴도 안 됐다.
통학차를 운전하는 운전사들도 규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취재팀은 8일에서 19일 사이 서울 서초구 도로교통공단 서울지부에서 열린 ‘통학차 운전사 안전교육’ 현장에서 통학차 운전사들을 대상으로 앞선 시험과 똑같은 시험문제를 냈다. 100명 중 94명이 운전 경력 10년 이상이었다. 100점 만점에 평균 37.5점. 네 문제를 모두 맞힌 운전자는 없었다. 0점이 14명이었다. 16년 동안 통학차를 운전했다는 강모 씨(46)는 “당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척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 캐나다에선 징역형까지
현행 도로교통법의 통학차 안전규정은 대다수 운전자에게 없는 법이나 마찬가지로 무시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운전자들이 통학차 안전 규정을 100% 지킨다 해도 우리 사회의 통학차 보호수준은 선진국에 비해선 턱없이 미흡하다.
현행법에 따르면 어린이가 타고 내리는 통학차 뒤나 바로 옆에서는 일단 차를 세워야 한다. 어린이를 칠 염려가 없다고 판단한 뒤에야 천천히 다시 차를 움직일 수 있다. 결국 ‘천천히 앞질러가도 된다’는 의미다. 어린이 안전보다 어른의 통행권이 존중되는 셈이다.
반면 선진국에서 통학차는 도로 위의 왕이다. “경찰차보다 무서운 차가 통학차”란 말이 있을 정도다. 최근 유튜브에선 미국 통학차 관련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통학차가 어린이들을 태우는 동안 뒤에서 따라오던 차 10여 대가 숨죽이며 줄지어 서 있었다. 반대 차로에서도 차들이 멀찍이 거리를 두고 정차했다. 경적 소리도, 추월 장면도 잡히지 않았다. 어린이가 모두 차에 탈 때까지 그 광경은 계속됐다. 이런 질서는 시민의식만으로 가능하진 않다. 미국에선 통학차량 운전사가 직접 위반 차량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위반자는 법정에 서야 할 정도로 처벌이 무거운 탓에 운전자가 위반할 엄두를 내지 않는다.
캐나다 역시 통학차 보호규정이 엄격하다. 온타리오 주에선 통학차에서 최소 20m 이상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야 한다. 처음 어기면 400달러(약 43만6000원)에서 2000달러까지의 벌금과 벌점 6점이 부과된다. 반복해서 어기면 1000달러에서 4000달러까지의 벌금, 벌점 6점(면허 종류에 따라 9∼15점이면 면허정지 또는 취소), 그리고 6개월 이하의 징역이 모두 동시에 부과된다.
이와 달리 한국은 ‘처벌’이라 하기에도 민망하다. 현재 도로교통법 시행령에 따르면 운전자가 통학차 보호의무를 위반해도 최대 ‘범칙금 5만 원’만 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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