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나는 편집장 자리에서 잘리는 것이 당연했다. 선정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고, 인터뷰를 왜곡하지 않는다고, 깊이와 재미를 동시에 가져갈 수 있다고 자만했다. …나는, 실패한 편집장이다.’(GQ 4월호 기고문 ‘한 연예 매체 편집장의 사퇴의 변’ 중에서)
누가 옆에서 혀를 차거나 말거나 간에 TV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아이돌그룹 문화를 진지하게 즐기는 사람들에게, 텐아시아라는 매체는 특별했다. ‘충격’과 ‘경악’, 그리고 ‘숨막히는 뒤태’로 가득 찬 듯한 연예보도 속에서 읽을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주는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강명석 전 텐아시아 편집장(37)도 특별한 존재였다. 고교생이던 1993년 서태지론(論)을 PC통신에 올렸을 때부터 그의 글은 대중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그리고 글 자체의 읽는 맛과 독특하면서 세련된 감수성으로 많은 팬을 모았다.
그랬던 그가 올해 2월로 텐아시아를 떠났고, 그와 함께 일하던 텐아시아 기자 5명도 사직서를 냈다. 모기업이 경영난을 겪고 있던 텐아시아가 새 회사에 인수된 뒤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사직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던 강 전 편집장은 얼마 뒤 GQ 기고문에서 ‘가수들의 공항 사진, 행사 사진으로 시원시원하게 기사를 꾸미자’는 지시를 거부했다고 고백했다. 아직 나설 때가 아니라며 인터뷰를 피하던 그를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텐아시아 출신 몇몇 기자와 함께 새 매체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새 매체는 어떤 성격이고 언제 나오나.
“이름은 ‘아이즈’라고 한다. 영어로 ‘∼화(化)하다’라는 뜻의 접미어 ‘IZE’다. TV 프로그램이든, 음악이든, 공연이든 우리 스타일로 ‘∼화하겠다’는 의미다. 무엇을 골라내서 깊이 취재하고, 쓸 뿐만 아니라 그걸 재미있는 스타일로 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콘텐츠를 스타일리시하게 파는 매체가 되려 한다. TV, 음악, 영화뿐 아니라 소셜미디어, 게임, 웹툰, 스포츠, 패션도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시대다. 20, 30대가 무엇을 즐기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걸 저희 방식대로 ‘아이즈시켜서’ 보여주겠다. 외부 전문가도 필자로 많이 참여시킬 것이다. 정식으로 매체를 공개하는 것은 7, 8월 정도이고 경력·신입 공채를 곧 진행한다. 대략적인 기획은 다 나온 상태다.”
―텐아시아와 비슷한 매체인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지금은 다른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것 같다. 텐아시아의 전신인 매거진t가 출범할 때에는 대중문화를 얼마나 깊이 있게, 재미있게 읽어내느냐에 대한 관심이 생길 때였고, 또 지상파방송에 케이블 채널과 인터넷이 추가되면서 취향이 세분되고 전문화되는 시기였다. 이제는 대중문화 속 카테고리가 굉장히 다양해졌고, 사람들이 깊이 관심을 갖는 분야가 제각각 하나씩은 있는 세상이 됐다. 그게 요리일 수도 있고, 남녀 간의 연애일 수도 있고, 몸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그에 대해서도 전문성 있는 읽을거리를 만들어 보겠다는 거다.”
―남성지와 비슷한 성격이 되는 건가.
“사실 고민하는 부분인데, 패션지들이 라이프스타일에 방점이 찍혀 있다면 우리는 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라이프스타일까지 포괄하는 방식이다. 또 판타지를 채워주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즐기고 생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텐아시아 인기의 비결은 뭐였나. 인기에도 불구하고 경영상의 부침을 겪은 이유는 뭐였나.
“지금의 20대 후반∼40대 초중반이 대중문화를 재미있게 즐기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대중문화 기사도 재미있길 바란다. 다양한 관점에서 깊게 보는 것도 중요하고, 그걸 표현하는 방식도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시장의 요구를 반영했다. 그런데 그런 시장 수요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건 아니다. 매거진t가 처음 생길 때만 해도 TV 비평이나 예능 프로그램 리뷰에 대해서는 ‘그런 걸 왜 하느냐’는 반응이 많았다. 그래도 편집장을 맡은 2년 동안 수익은 꾸준히 냈다. 광고 수익은 별로 크지 않았고 순전히 콘텐츠를 파는 걸로 살았다. 한류와 맞물려 일본어 콘텐츠로도 팔렸다. 모기업의 경영이 어려웠던 거지, 텐아시아가 적자를 내지는 않았다.”
―대중문화 평론을 시작한 계기는. 왜 그중에서도 ‘고급 장르’가 아닌 TV 프로그램 리뷰를 쓰나.
“처음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글이 소통의 한 방식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PC통신, 둘 중 하나가 없었다면 평론을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TV를 보고 자랐고, 나를 가장 즐겁게 해준 것에 대해서 써야 하지 않을까. 공대 출신이고, 딱히 등단 절차를 밟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이돌그룹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지나치게 호평 일색이라는 얘기도 있고 샤이니와 인피니트 팬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아이돌은 한국 연예계에서 투자가 가장 많이 이뤄지고 노래와 춤, 패션, 예능과 드라마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블록버스터 산업이다. 빠지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샤이니와 인피니트 팬은 아닌데, 내가 보기에 잘한다. 어떤 그룹이 좋은 음악으로 멋진 무대를 연출하면 당연히 애정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나쁜 걸 왜 나쁘다고 쓰지 않느냐 하면, 대부분은 그럴 가치도 없고 좋은 것들을 쓸 시간도 모자라니까. 보고 듣고 읽을 게 넘쳐나는 시대에 내가 모든 걸 채점해서 알려줘야 할까. 내가 좋아하고 의미 있다고 여기는 걸 독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극성팬 때문에 고생하진 않나. 아이돌 팬들이 리뷰를 제대로 평가하나.
“그게 가장 대표적인 편견 같다. 지금의 아이돌 팬덤 주축 중 하나는 30, 40대다. 아이돌을 무조건 칭찬한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다양한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아주 수준 높은 소비자들이다. 야구팬들이 자기 팀을 무조건 칭찬하는 기사를 좋아하나, 자신들의 불만과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주는 기사를 좋아하나. 그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한국 대중문화의 힘과 한계에 대해 말해 달라.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외하면 볼거리, 즐길거리를 꾸준히 만들어내고 해외에서 그럭저럭 통하는데 오히려 내수시장은 점점 더 시큰둥해지고 있다. 음악을 예로 들면 전반적으로 완성도는 조금씩 올라가는데 올해 뭘 새롭게 들어야 한다고 제안할 건 없고 봄이 되니까 ‘벚꽃엔딩’이 다시 뜨는 식이다. 지금 내 또래인 30대 중후반이 지나칠 정도로 대중문화를 ‘장기 집권’하고 있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 젊은층이 구매력이 없어 시장에서 소외되고, 엔터테인먼트의 활력이 떨어진다. 한창 많은 것을 즐겨야 할 젊은층에게 유행이 뭔지 묻는 게 아니라 어떻게 취업했는지를 묻는 시대다. 요즘 20대가 창작자로서도, 독자로서도 가장 쉽게 즐길 수 있는 장르는 웹툰 아닐까. 소득의 상당 부분을 스마트폰 이용료로 내는 젊은이들이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눈길을 돌리는 거다. 내가 TV를 보면서 행복을 느꼈듯이 10대, 20대가 웹툰이든 요리든 패션이든 어떤 것에서든 보고 듣고 느끼고 더 잘 즐기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다. 10대, 20대일 때 그런 걸 스스로 알기는 어렵다. ‘아이즈’가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
―자료조사는 어떻게 하나.
“음악은 글 쓰는 시간, 이동하는 시간 내내 듣고, TV는 하루에 5시간 이상 본다. 하루에 드라마 최소한 한두 편, 예능 프로그램 한두 편 이상은 본다. 남이 하는 이야기만 들어서는 글을 쓸 수 없다. 자기 전이나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책을 읽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대중문화 평론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내 세대와 함께 가지 않을까. 언젠가는 감각도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꾸준히 읽어주는 분들이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우리 세대의 대중문화도 비슷하게 될 것 같다. 조용필도 이승환도 공연을 열면 사람이 굉장히 많이 몰린다. 과거 세대에게는 그런 무대와 시장규모가 미사리였다면 앞으로는 그게 잠실주경기장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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