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90% 조례 스트레스…“학교가 정치운동 놀이터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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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조례’에 멍드는 학교현장

지난해 말 서울 성북구에 있는 A고교 정문 앞. 오전부터 시끌시끌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간부인 이 학교 교사 A 씨가 교육감 선거운동에 연루돼 해직 판정을 받고 교문을 나섰다. 주변 학교의 전교조 교사 20여 명이 몰려와 환송식을 열어줬다. 여기에 학생 수십 명이 동참했다. 분위기는 점차 고조됐다. 거친 구호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말이 환송식이지 항의 집회에 가까웠다.

○ 실적 쌓기·말뚝박기용 조례에 피로감 누적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대다수 학생은 불편함을 호소했다. 한 학생은 “괜히 공부하면 배신자 소리를 들을까 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했다. 집회 내내 대기한 교사들도 마찬가지 심정. 그런데도 학교는 제지하지 못했다. 지난해 1월 공포된 학생인권조례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의 학내 집회 권리를 보장한다.

결국 학교 측은 학부모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자녀를 데리고 가라고. 집회가 계속되자 마지막엔 경찰까지 출동했다. 집회를 지켜본 박모 교사는 “학교가 정치운동의 놀이터가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전북 부안군의 B초등학교는 조례 때문에 학교 업무가 몇 차례 마비됐다. 조례가 시시콜콜한 업무방식까지 규정하면서 교사 부담이 늘어서다. 이 학교 교감은 “이젠 일상적인 교무회의 내용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경기 C초등학교는 최근 교육청으로부터 조례대로 임원을 정확히 구성하지 않았으니 학부모회를 재조직하라는 공문을 받았다. 가뜩이나 바쁜 학기 초에 업무가 급증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구성된 학부모회는 기존 학교운영위원회와 갈등을 빚었다. 이모 교사는 “교사가 어느 조직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학교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고 전했다.

한번 생긴 조례는 교육감이 바뀌거나 교육현장 상황이 달라져도 바꾸기 쉽지 않다. 시도 의회를 통과해야 수정 또는 폐기가 가능하다.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개입돼 있다. 그런데도 ‘아니면 말고 식’ 교육 조례가 남발된다. 충분한 논의나 법적 논리에 대한 검토 없이 만들어진다. 일종의 ‘실적 쌓기용’인 셈이다.

상위법과 충돌하는 ‘말뚝박기용’ 이념 조례도 문제. 지방교육청 관계자는 “의원들이 나눠 먹기식으로 다른 의원 조례에 거수기 역할을 해주다 보니 조례가 양산된다”고 지적했다.

○ 교사 90% “조례로 스트레스 커졌다”

조례가 제정되면 교육청은 관련 공문을 학교에 내려 보낸다. 학교에서는 이때부터 새로운 업무가 시작된다. 우선 교사는 조례의 내용을 공부하고 이를 어떻게 학칙에 반영할지 검토한다. 교사 학부모 학생의 생각과 맞부딪치는 부분이 있으면 이를 조율하도록 애도 써야 한다.

조례가 제정됐다고 상황이 순식간에 바뀌진 않는다. 이를 연착륙시키려는 노력도 결국 학교의 몫이다. 예를 들어 학생인권조례가 생기면서 두발 복장 소지품을 어떻게 규제할지 일선 학교들이 다시 판단해 학생에게 전달하고 납득시켜야 했다.

학교 현장의 스트레스는 동아일보-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설문 결과 그대로 드러났다.

서울 서초구 D고교 임모 교사의 별명은 ‘임 조례’. 학교에 떨어지는 교육 조례 관련 업무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친다 해서 선배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처음엔 하나둘씩 하던 일이 언제부턴가 그냥 그의 전담업무가 돼버렸다. 그런데 너무 힘들다. 업무량이 늘어난 점 외에 워낙 민감한 사안이 많아서다. 그는 “잠깐 휴직계라도 내서 조례로부터 탈출하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임 조례’ 같은 교사는 다른 학교에서도 흔하다. 전국 초중고교 교사 372명 가운데 ‘교육 조례가 학교에 불필요한 행정 업무를 가중시킨다’고 답한 응답자는 91.4%에 이르렀다. ‘교육 조례로 스트레스가 가중됐다’는 교사는 90.1%. 교육 조례가 교사 사이, 교사와 학생·학부모 사이의 갈등을 부추긴다고 답한 응답자도 각각 79.8%, 87.9%에 이르렀다.

좌파 성향 교육감들이 교육 조례 제정에 적극적인 이유와 관련해선 ‘특정 이념 및 교육 지배구조 형성 목적’이란 대답이 33.6%로 가장 많았다. 이어 △교육감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32.5%) △특정 단체의 주장 반영 목적(23.1%) △학생·학부모의 다양한 교육 요구 반영 목적(5.1%) △교육민주화 등 교육발전 목적(4.3%) △기타(1.4%) 순이었다.

정부에서도 남발되는 교육 조례의 심각성을 최근 인지했다. 일단 한국교육개발원(KEDI)을 중심으로 2000년대 이후 제정된 교육 조례 현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이후 이들 조례가 끼친 영향을 분석해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할 계획이다.

이성호 중앙대 교수(교육학과)는 “교육 조례가 본연의 목적인 학교 현장 지원이라는 취지로 돌아가야 ‘조례 공화국’이란 오명을 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신진우·김도형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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