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사이트인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에는 한 어머니가 아들의 시신이 안치된 관 앞에서 오열하는 모습의 흑백사진이 최근 올라왔다. 5·18민주화운동의 아픔을 상징하는 사진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그런데 이 사이트에 사진을 올린 사람은 사진에 ‘아이고 우리 아들 택배 왔다. 착불이요’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비극을 모독한 이런 행위에 대해 5·18유족회 등은 강력한 법적 대응을 할 방침이라고 24일 밝혔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사진 속 어머니는 1980년 당시 광주에서 가게를 운영했던 송영도 씨(당시 46세)다.
1980년 5월 21일, 송 씨는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족들의 건강을 빌기 위해 광주 동구 서남동(당시 구시청 사거리) 집에서 절로 가던 중 이웃주민을 만났다.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들이 모여 밥도 못 먹으며 군인들과 밤새 싸우고 있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고 송 씨는 “내가 데모는 못하지만 그런 일은 해야지”라며 성금 1000원을 낸 뒤 함께 모금을 했다. 십시일반으로 모은 성금 10만 원으로 동네슈퍼에서 빵과 우유, 찐계란 등을 샀다. 그러고는 전남도청으로 가 ‘독재타도’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있던 시민들에게 빵 등을 나눠줬다.
송 씨는 한 시민이 대치하던 계엄군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도 밥을 못 먹고 있을 텐데 먹을 것을 갖다 주자”는 말을 듣고 찐계란 여러 판을 건넸다. 남동생 같았기 때문이다. 계엄군은 “고맙다”며 허겁지겁 계란을 먹었다.
송 씨는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가슴 아픈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귀가했다. 그런데 집에 오니 아들(김완봉 군·당시 15세·광주 무등중 3년)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은 엄마의 귀가가 늦어지자 엄마를 찾으러 집을 나간 것이었다.
그날 저녁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던 송 씨는 이웃주민들로부터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아 숨진 사람 가운데 머리가 짧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밤새 시내 병원들을 찾아 헤맨 송 씨는 22일 오전 광주 적십자병원 영안실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고 바로 실신했다. 아들은 엄마와 길이 엇갈려 도청 앞까지 갔다가 계엄군의 집단발포 때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6·25전쟁 당시 북한에서 홀로 내려와 결혼을 한 송 씨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남매를 키웠다. 우등생이었던 외동아들은 그에게 삶의 등불과 같았다.
송 씨는 먼저 떠난 아들을 8일 동안 묻지 못했다. 당시 안장할 장소도 없었고 군과 대치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5월 29일 망월동 묘역에 아들을 안장하는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졌다. 그가 오열하는 모습은 이날 망월동 묘역에서 취재하던 나경택 씨(5·18 당시 전남매일 사진부 차장)의 렌즈에 담겼다.
5·18기념재단은 나 씨를 비롯해 황종건 김녕만 씨(이상 당시 동아일보 사진기자) 등이 찍은 5·18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 사진들을 모아 1991년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사진집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 송 씨 모자의 비극은 ‘망월동 묘역 관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송 씨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한 많은 세월을 보내다 2003년 69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완봉 군은 현재 국립5·18민주묘지 1-18번에 안장돼 있다.
고 완봉 군의 여동생(45)은 2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일베 회원들이 인간이라면 이런 모독을 할 수는 없다”며 “만약 자기 가족이 같은 비극을 당했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일베에 올라온 5·18 모독 사진은 이뿐만이 아니다.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택배’, ‘홍어’로 지칭하는 등의 작태를 보이고 있다. 5·18부상자회, 5·18유족회, 5·18구속부상자회는 일베가 5·18 희생자들을 모독한 사진 6장 속 피해자나 유족들을 모두 찾아 법적 대응키로 했다. 김찬호 5·18기념재단 사무처장은 “피해자나 유족들이 고소할 경우 사자명예훼손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며 “일베 관계자들을 모두 고소해 처벌받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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