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이면 취임 100일… 관저 24시
자정까지 보고서 읽는 朴대통령 “외로울 틈도 없어요”
지난달 어느 날 저녁 청와대 대통령 관저 앞. A 장관이 긴장된 표정으로 관용차에서 내렸다. “업무보고 내용에 대해 대통령께서 궁금한 점이 있다고 하니 좀 들어오셨으면 한다”는 청와대 부속실의 전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른 부처 B 장관도 관저에서 대통령을 뵌 적이 있다던데….’ 그간 관가에 돌던 소문을 떠올리며 A 장관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박근혜 대통령은 3월 말부터 한 달 넘게 진행된 부처별 업무보고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였다. 업무보고를 통해 자신의 국정철학을 각 부처 공무원에게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 때문에 공식 업무보고 전에 미리 보고사항을 받아 집무시간 후 관저에 돌아가 꼼꼼히 파악했다. 내용에서 이해가 안 되는 점을 발견하거나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장관을 직접 관저로 불러 자세한 설명을 듣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모든 부처의 장관을 돌아가며 부르기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해당 장관을 불렀다고 한다. 일종의 현대식 경연(經筵·고려, 조선 시대에 군주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인 셈이다. 박 대통령은 업무보고 이외에도 장관이나 수석을 관저로 부르는 일이 종종 있다.
‘낮에는 정사(政事)를 살피고 밤에는 경연을 벌이는’ 일이 일상이었던 조선의 왕에게 경연은 집무시간 이후의 또 다른 업무였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뒤 2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경연에 참석했고, 정조는 경연하는 신하들을 오히려 가르칠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왕이 해가 진 뒤에 경연에만 몰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변복(變服)을 하고 저잣거리를 암행하며 백성의 삶을 지켜보기도 하고, 재야의 학자들과 교분을 쌓기도 했을 터다.
일정 대부분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오늘날의 대통령도 청와대 본관의 삶과 달리 관저의 삶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다. 집무시간을 조명이 밝게 비친 무대 위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 이후의 시간은 암전(暗轉)된 무대 뒤의 이야기다. 그 밤에,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지낼까.
청와대 어디든 업무하는 곳
4일로 취임 100일을 맞게 되는 박 대통령이 관저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그의 사생활은 대선 이전에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실제로 참모들은 “박 대통령은 사적인 시간도 주로 공적인 일에 쓴다”, “가족이 없기 때문에 관저로 돌아온 후에도 일하는 데 시간을 쏟아 업무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박 대통령의 관저 생활은 본관에서 했던 업무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3, 4월에는 북한의 도발 위협에 관저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김장수 대통령국가안보실장과 연락하며 북한의 작은 동향, 사소한 동태까지 보고를 받았다. 김 실장이 정부 출범 전날인 2월 24일부터 3개월여 동안 청와대 인근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비상 대기한 것도 같은 이유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관저에서 국가안보를 챙기는 것을 보면 국군 통수권자로서의 무게감을 얼마나 느끼는지 알 수 있다”고 전했다.
다음 날 봐야 할 자료나 면담 보고서를 챙겨서 관저로 돌아오는 날도 많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청와대 모든 시설이 대통령에게는 업무 장소라고 보면 된다”며 “(본관) 집무실에 있든 관저에 있든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보고서를 읽다 잘 모르겠다거나, 좀 더 알아봐야 할 것이 생기면 참모들을 전화로 찾는다. 전화 횟수는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과 이정현 정무수석비서관이 가장 많지만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해당 수석에게 직접 전화한다. 박 대통령은 대선 전 공부 모임을 할 때도 궁금한 대목이 있으면 오후 11시가 넘은 늦은 밤에도 참모나 전문가들에게 전화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주요한 연설문이나 메시지도 관저에서 직접 작성하거나 고친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관저에서 비공식 행사나 회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임 대통령들에 비해 공식 일정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다만 하나의 일정을 치르더라도 내용과 참석자들에 대해 철저하게 숙지하느라 준비하는 시간이 길다고 한다. 따라서 예전 대통령들처럼 관저로 가까운 정치인이나 지인들을 불러 흉금을 터놓을 틈도 별로 없었다. 박 대통령은 5월 15일 언론사 정치부장단과의 만찬에서 “일과 후 시간이 대통령에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정신없이 바빠서는 안 되고 뭔가 큰 구상도 다시 돌아보면서 나라의 방향과 이런 것을 심사숙고하고 각계와 이야기도 나눠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일과 이후에 뭘 하느냐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보내왔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근에는 취임 100일을 맞아 각계 여론 주도층 인사들의 조언을 정리한 보고서를 읽으며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긴 호흡을 가다듬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저에서는 물론 휴식도 취한다. 대선 전처럼 주요 인터넷 사이트의 댓글도 보고, 정치 관련 기사나 칼럼도 읽는 것으로 전해졌다. TV 시청도 가끔 하지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진 않는다고 한다. 관저에서 키우는 진도개 두 마리에게 직접 먹이를 주지도 못할 만큼 바쁘다는 것. 취임식 날 오전 자택이 있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주민이 건네준 이 강아지들에게 가끔 간식용 먹을거리를 던져주는 정도다.
박 대통령은 특별한 만찬 일정이 없으면 오후 6시경 관저로 돌아온다. 만찬이 있어도 보통 오후 6시에 시작해 오후 8시 이전에는 마치는 편이다. 늦어도 오후 9시 정도에는 관저로 향한다. 이는 대선 이전에 아무리 저녁 일정이 길어져도 오후 10시 전에는 늘 삼성동 자택으로 귀가했던 것과 비슷하다.
보고서를 읽다 보면 자정을 넘겨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럼에도 오전 5시 전에 일어나는 평소 습관을 유지한다. 기상해서는 20년 가까이 꾸준히 해오는 단전호흡으로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한다. 조간신문과 보고서를 읽고 관저에서 차로 3∼4분 거리인 본관으로 오전 9시경 출근한다.
박 대통령이 가장 아끼는 피붙이인 조카 세현이(동생 지만 씨의 아들)는 아직 청와대로 놀러오지는 않은 것 같다고 측근들은 말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국면부터 지만 씨 부부를 삼성동 자택으로 부르지 않았고, 명절 때도 함께하지 않을 정도로 주위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써왔다. 지난달 청와대에서 오찬을 함께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와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이 “혼자 있으면 많이 외롭겠다”고 우려 섞인 위로를 전하자 박 대통령은 “자료를 검토하느라 바쁘다. (그래서) 외롭지 않다”라고 했다.
▼ 역대 대통령들의 관저 생활은 ▼
■ DJ-盧, 문서 검토 ‘파워 On’ YS-MB, TV 보며 휴식 ‘파워 Off’
Power On-Power Off
“국정에는 낮과 밤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99년 12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제1부속실장으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관저 생활을 지켜봤던 김한정 연세대 객원교수는 말했다. 국정에 무한책임을 지는 대통령의 업무는 ‘일과’와 ‘일과 후’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취지다. DJ는 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각종 보고서를 관저에서 읽었다. 의문이 생기면 보고서를 작성한 비서실의 해당 수석비서관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질문을 했다. 가장 많이 전화한 대상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외교안보수석이었다. 이들은 자다가도 일어나 DJ의 전화를 받아야 하는 날이 꽤 있었다. 현안에 대해 자문을 하기 위해 비서실장이나 수석비서관 또는 당의 인사를 관저로 직접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관저에서도 청와대 내부통신망인 이지원을 통해 각종 보고서 등 문서를 열람하고 재가를 내리거나 보완을 지시했다. 문서를 한 번 보고 닫을 때 열람시간이 찍혀 나오는데 때로는 오전 1시 반이나 2시까지 보고서를 검토할 때도 있었다. 심지어 오전 5시 반으로 최종 열람시간이 찍힌 지시사항이 내려올 때도 있었다. 끊임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여론 흐름을 읽으려 했다.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을 보다가 “이러이러한 점이 불편하니 개선하라”는 지시를 할 때도 있었다.
DJ와 노 전 대통령에게 모자란 것은 잠이었다. 청와대 본관에서든 관저에서든 언제나 ‘업무 전원’이 켜져 있는 파워온(Power On) 상태였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달랐다. 임기 내내 수행실장을 지낸 김기수 비서실장은 “인사를 해야 할 때 후보군의 자료가 담긴 봉투를 가지고 관저로 퇴근해서는 대통령 혼자 고민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런 경우 말고는 보고서나 검토자료를 들고 관저로 돌아온 적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본관 집무실에서 퇴청한 이후에는 여느 가정처럼 TV를 보다 오후 10시 전에 잠을 청했다. 업무 전원을 꺼놓는 파워오프(Power Off) 모드였던 것이다.
물론 TV 뉴스를 보다 떠오르는 지시 사항이 있으면 바로 참모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서 이원종 당시 정무수석비서관은 휴대용 TV를 늘 가지고 다녔다. YS가 지시하는 내용이 어느 채널의 뉴스인지를 곧바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을 자랑할 정도로 일중독이었지만 관저로 돌아온 뒤에는 가급적 일에서 해방되려고 했다. 임기 초에는 저녁 식사를 하다가 방송 뉴스를 보면서 참모들에게 자주 전화를 해서 보도 내용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MB는 본관에서 철저하게 일하고 관저에서 충분히 쉬면서 다음 날 해가 떠 있을 동안 국정을 버텨내는 힘을 얻는 스타일이었다. 그렇다고 밤잠이 많지도 않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등받이에만 쿠션이 달린 딱딱한 의자에 앉아 뉴스나 디스커버리채널 등을 보다 1시간여 졸면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오전 1시경에 잠이 들어 4시경에는 잠에서 깼다. 아침 일찍 업무를 시작하는 ‘얼리 버드(early bird)’였다.
만남-소통
YS는 관저에서 가끔씩 서울 시내 P호텔의 이발사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YS가 야당 시절부터 단골로 머리를 맡기던 이발사였다. 어느 날 그 이발사가 YS의 전화를 받으며 거듭 “예, 각하”라고 하자 한 손님이 그를 밖으로 불러내서는 “대통령하고 친하냐?”며 다짜고짜 민원을 했다. 자신이 중소기업 사장인데 대기업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YS는 이발사에게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대기업의 횡포가 아니라 중소기업의 잘못이 컸다.
YS는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많이 했다. 야당 때부터 친했던 인사들에게 관저 소파에 앉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세간의 여론을 전해 들었다. 괜한 오해를 살까 봐 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부르지는 않았다. 특히 YS는 참모나 장관의 보고 내용이 서로 다르거나 뉘앙스에 차이가 나면 직접 여기저기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곤 했다. 그러나 참모나 장관을 관저로 부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DJ는 사람들을 자주 관저로 불렀다. 김중권 박지원 같은 당시 비서실장이 현안이 있을 때마다 관저를 찾았다. DJ가 중요시한 대북관계를 관장했던 임동원 당시 국가정보원장도 많이 드나들었다. 청와대 밖의 인사로는 박권상 당시 KBS 사장이 시중의 여론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1970년대 반정부 투쟁을 하면서 고초를 함께 겪었던 개신교 원로 목사 몇 사람도 DJ가 편하게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대였다. 당시 대통령정책수석비서관을 지낸 김한길 민주당 대표 부부도 관저에서 특유의 말솜씨로 DJ를 즐겁게 했다고 한다.
DJ는 당의 일에는 잘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당내 문제가 시끄러울 때는 사무총장이나 원로들을 불렀다. 권노갑 김옥두 같은 최측근은 워낙 얼굴이 알려진 인사인 데다 서로 잘 알기 때문에 관저로 부르기보다는 전화를 주로 했고,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결정적 순간에만 불러들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관저에서 다양한 손님을 맞이했다. 안희정 현 충남지사 등 측근들을 부르기도 했다. MB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을 주말에 불러 주요 인선을 포함한 국정 전반에 대한 의견을 듣곤 했다고 한다.
휴일-가족
DJ는 일요일 오전 가끔씩 이희호 여사와 함께 ‘몰래 드라이브’를 나갔다. 경호실 차량을 최소 편대로 해서 교통 혼잡이 뜸한 시간과 장소를 골랐다. 이럴 때 DJ는 대통령 공식차량인 캐딜락이 아니라 벤츠를 탔다. 최소 편대라고 해도 대통령이 어느 차에 탔는지를 모르게 하기 위해 같은 모양의 벤츠 두 대가 동원됐고, 그 앞뒤를 경호차량이 호위했으니 쉽게 눈에 띌 수도 있는 대열이었다. 경호실에서는 혹시나 교통체증에 걸려 위험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행선지는 자유로를 타고 행주대교를 건너 돌아오거나, 때로는 미사리까지 들렀다 돌아오는 코스였다. DJ는 꽃과 강을 보다가 오수를 즐기기도 했다.
그래도 대통령들에게 일요일은 온 가족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다. 여느 가정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자식과 손자, 손녀를 만나 식사를 함께했다.
MB는 토요일에는 주로 테니스를 치고 관저로 돌아와 손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평일에는 관저로 돌아오는 시간이 오후 7∼8시여서 오후 6시에 저녁을 먹는 김윤옥 여사와 함께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휴일에는 MB 내외의 식사 타이밍이 맞아 김 여사가 해주는 닭볶음탕을 손녀들과 함께 먹곤 했다. 특이하게도 MB의 딸들은 매일같이 돌아가면서 손녀들을 관저에 데리고 왔다. 손녀들이 돌아가며 키우던 진도개 청돌이가 MB에게 위안을 줬다. 청돌이는 MB를 보면 혀로 얼굴을 핥는 등 온갖 애정표현을 했다. “웬만한 참모보다 낫다”는 말까지 나왔다.
DJ는 일요일 점심을 주로 가족들과 함께했다. 그의 세 아들은 관저에 올 때 횟감이라든지 별미가 될 만한 음식을 싸오곤 했다. 노 전 대통령도 자식들이 토요일에 관저에 와서 하룻밤을 묵고는 일요일 아침을 같이 먹었다. 개신교도였던 YS는 일요일 오전 목사를 불러 예배를 보고 조찬을 했다. 같은 사람만 부르면 말이 나오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목사들을 바꿔 불렀다. 가족과는 일요일 점심을 함께했다.
음식-운동
1993년 2월 26일 오전 5시가 막 지났을 무렵 노량진경찰서 소속 경찰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관저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경찰은 조깅용 운동화 한 켤레를 손에 들고 있었다. 취임 첫날밤을 보낸 YS가 찾던 그 조깅화였다. 그날 YS는 일상처럼 조깅을 하기 위해 관저 현관으로 나왔다. 부속실에서는 새 조깅화를 가져다 놨지만 YS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 운동화 가져다 놨지?” 관저는 난리가 났다. 자택인 상도동으로 부리나케 전화를 걸어 “신발장에 있는 운동화, 얼른 가져오라”고 지시를 했다. YS가 마라토너 황영조와 함께 조깅했을 때 신었던 그 운동화였다. 노량진경찰서에 연락해 이를 청와대에 대령하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YS는 청와대 내에 마땅한 공간이 없어서 취임 후 첫 한 달은 경복궁 경내를 뛰었다. 이후 청와대 내 녹지원에 조깅 코스를 만들어 매일 오전 6시부터 1시간가량 뛰었다. 같이 뛰어야 하는 비서관들에게는 고역이었다.
허리가 좋지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은 아침에 일어나면 30분 동안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젊었을 때부터 했던 습관인 스트레칭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온전히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봄이나 가을 휴일에는 주로 장관이나 참모들과 북악산 등반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등반길에 예기치 않은 질문을 종종 던져 동행인들은 항상 긴장해야 했다. MB는 국가대표 출신 테니스 선수들과 복식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경기 도중 공에 얼굴을 맞은 적도 있다. 몸이 불편했던 DJ는 이 여사와 함께 수영장을 걸으며 다리 관절 근육을 키웠다.
DJ는 청와대 밖에서 만든 음식을 즐기기도 했다. 손맛 좋은 관저 주방장이 철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내놨지만 때때로 DJ는 “청와대 밥은 만날 똑같냐”라고 불평을 했다. 심기가 불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더욱 그랬다. 그때면 비서들이 몰래 나가 추어탕이나 짱뚱어탕을 사오곤 했다. 군것질을 좋아해서 밤에는 관저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고, 붕어빵, 떡볶이, 튀김 등을 사다 먹기도 했다. MB도 청와대 인근 곰탕집 등을 불시에 찾아 외식을 즐기곤 했다.
임기 말
YS는 관저로 퇴근하고 나서의 심경을 적막강산에 비유한 적이 있다. 임기 후반에서 임기 말로 치닫던 때, 레임덕은 왔고 관저로 부를 지인은 많지 않았다. 아들들이 구속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DJ는 아예 관저 자신의 방문을 닫아걸어 버리곤 했다. 그럴 때면 관저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돼버렸다. MB도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저녁을 먹을 때 TV 뉴스를 보지 않았다.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 개설에 관심을 갖고 있던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전날까지도 바삐 움직이긴 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고 있는 권력의 무상함까지 감추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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