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경협의 상징이었던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은 약속이나 한 듯 10년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두 사업은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기며 생명력을 보이기도 했으나 변덕스러운 남북관계의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하고 결국 정치적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 정치적 희생양이 된 개성공단
2003년 6월 착공한 개성공단의 첫 번째 위기는 2008년 찾아왔다. 이명박 정부가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개방하면 10년 안에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하겠다는 ‘비핵·개방 3000’ 구상을 내놓자 남북 관계에 냉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해 7월 박왕자 씨 피격 사망 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중단되자 북한은 12월 개성공단 상주 인원을 880명으로 줄이고 통행시간을 제한하는 ‘12·1조치’를 취했다. 북한은 2009년 3월에도 한미 연합 군사연습 ‘키리졸브’를 문제 삼아 육로 통행을 차단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하자 우리 정부는 개성공단 신규 투자를 금지하고 체류 인원을 축소하는 ‘5·24조치’를 발표했다. 그해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개성공단 방북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갖은 곡절을 겪으면서도 가동을 계속하던 개성공단은 올해 4월 3일 북한이 “남한이 개성공단의 존엄성을 침해했다”며 통행을 제한하고 8일 북측 근로자를 전원 철수시켜 9일부터 생산이 전면 중단됐다. 우리 정부는 26일 잔류 인원을 전원 귀환시키기로 결정했다.
개성공단 가동이 59일째 중단되면서 입주기업들과 관련 업체들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정책팀장은 “입주기업 123곳과 협력기업 5800여 곳이 줄도산하면 피해 규모가 5조∼6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 하루아침에 추락한 금강산관광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 떼 방북’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그해 11월 18일 통일의 물꼬를 터줄 것이란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현대 금강호’가 첫 출항을 했다.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이뤄질 때만 해도 금강산관광의 장래를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 현대그룹이 5억 달러를 북한에 불법 송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금강산관광 사업은 위기를 맞았다. 현대아산은 2003년 육로관광을 통해 활로를 찾았다. 2007년 한 해 34만8263명이 금강산을 찾는 등 1998∼2008년 관광객 수는 195만 명이나 됐다. 사업자인 현대아산도 2005년부터 흑자로 전환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하지만 2008년 7월 11일 새벽 금강산관광특구 산책에 나섰던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 초소병이 쏜 총탄을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뒤 금강산 관광 사업은 전면 중단됐다.
현대아산과 협력업체들은 금강산관광 중단에 따른 매출액 손실이 8500억여 원(3월 기준·개성관광 1100억 원 포함)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금강산관광 인프라 및 설비에 투자한 약 3600억 원을 합치면 총 피해액이 1조2100억 원을 웃도는 셈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