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장사를 마무리한 오후 3시. 김지효 씨(49)는 눈가와 어깨를 묵직하게 짓누르는 피로를 털어내려 애쓰면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만두를 빚고 있었다. 하루를 꼴딱 넘겨 식당에 딸린 방에서 오전 6시에야 겨우 잠자리에 누웠다가 오전 8시쯤 다시 일어나 식당 일을 한 지도 두 달이 넘었다. 정확히는 3월 29일 채널A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에서 ‘착한 식당’에 선정된 그 다음 날부터다.
김 씨의 가게는 경기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햄바라기 수제햄 부대찌개’. 그는 “점심, 저녁식사 시간 때는 말 한마디 할 틈이 없고 오후 3시 무렵부터는 잠시 짬을 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도 휠체어를 탄 손님부터 백발의 신사, 꼬마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까지 쉴 새 없이 가게 문을 열고 닫았다.
발색제 역할을 하는 첨가물인 아질산나트륨을 쓰지 않고, 정직한 재료로 직접 정성껏 만드는 햄과 소시지, 사골을 푹 우려낸 진짜 육수가 이 집 부대찌개의 주인공이다. 전문가들조차 먹거리 X파일 제작팀에 “‘착한 부대찌개’는 태생부터 존재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김 씨의 고집이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렸다.
한 걸음 앞서 나간 정육점 아줌마
스물두 살의 김 씨는 서울 정릉 산길정육점 주인이었다. 정육점을 하던 이모의 소개로 결혼한 뒤 남편과 정육점을 열었다. 남편은 대형 식당에 고기를 납품했고, 산길정육점은 김 씨가 도맡았다.
작은 식당 여러 곳에 납품을 하면서 식당 주인들이 주방장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힘들어 한다는 걸 알았다. 그는 이름 난 주방장과 찬모(饌母)를 고용했다. 작은 식당을 위해 반조리 상태의 돈가스와 돼지갈비 등 60여 가지 음식을 만들어 팔았다. 주방장이 없어도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도록 음식마다 레시피도 꼼꼼히 적었다. 하루에 돼지갈비를 300근씩 파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TV를 보다가 독일은 집에서 소시지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정육점 냉장고에는 볼깃살(뒷다리살)만 한가득이었다. 돼지 한 마리를 잡으면 삼겹살과 목살만 팔리고 볼깃살은 처지기 일쑤였다. 당시 삼겹살 한 근(600g)에 5700원 할 때 볼깃살은 1000원이었다. 하지만 볼깃살을 가공해 소시지로 만들어 팔면 삼겹살과 가격을 똑같이 받을 수 있었다. 쇠고기 돼지고기를 썰다보면 제법 생겨나는 부스러기도 알뜰하게 쓸 수 있겠다 싶었다.
판매가 저조한 볼깃살을 가공해서 삼겹살 못지않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면, 비싼 삼겹살과 목살 가격을 보다 저렴하게 책정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육가공의 매력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나는 설거지 마이스터?
서울 상계동 미도파백화점(현 롯데백화점 노원점) 지하의 만두 코너에 고기를 납품하러 갔다가 우연히 수제 소시지 판매 코너를 봤다. 소시지 가게 주인을 통해 건국대에 독일식 식육 제조 마이스터 과정이 개설됐다는 정보를 접하고 당장 등록했다.
처음 두 달 반 동안 일주일에 이론교육 4시간 외에는 설거지만 했다. 한 달에 70만 원씩 수업료를 내고, 내 돈으로 밥 사먹으면서 설거지라니. 어이가 없었다. 수강생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갔다. 김 씨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마이스터에게 따졌다. “비싼 수강료 받고 설거지만 시키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마이스터가 물었다. “처음에 왔을 때 소시지 기계를 싹 분해해서 닦는 데 몇 분이나 걸렸습니까.” “두 시간요.” “지금은 얼마나 걸립니까.” “…30분요.”
마이스터는 담담히 설명했다. “모든 가공은 위생이 첫째입니다. 소시지를 만들 때 아침저녁으로 두 시간씩 뜯어서 씻고 조립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에 30분 이상 걸리면 분해해서 안 닦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이렇게 안 하지만 독일에서는 매일매일 하는 일입니다. 위생 관념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식품 제조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첫 수업에는 52명이 참석했지만 마지막 수업에는 김 씨와 마이스터의 지인 단 2명이 남았다.
1500만 원으로 시작한 부대찌개 식당
마이스터 과정을 마친 뒤 1997년 서울 금호동 금남시장에 정육점 ‘훔메’를 차렸다. 장사는 잘됐다. 식당 서너 곳에 지분도 투자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남편의 사업이 휘청하는가 싶더니 투자한 식당 하나가 명도 소송에 걸리는 바람에 수억 원을 날렸다. 불행은 떼 지어 찾아왔다. 전셋집에 문제가 생겼고, 남편 사업도 결국 무너져 내렸다. 손에 딱 3000만 원이 남았다. 보증금 15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짜리 집을 얻고 나머지 1500만 원으로 식당 자리를 구했다.
안양 만안구청 옆에 있는 이름난 부대찌개 집에서 식사를 할 일이 있었다. 김 씨 입맛에 부대찌개가 그리 맛있진 않았는데 가게는 손님들로 넘쳐났다. ‘내가 가진 소시지 10년 기술에다 앞으로 10년만 부대찌개에 매진하면 이 가게보다는 잘할 수 있겠다.’
단속에 걸려 문을 닫은 불법 오락실 자리를 얻었다. 가게 주인에게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보증금 1억 원은 1년 뒤에 반드시 갚겠다고 다짐했다. 김 씨가 간직하던 소시지 기계 한 대가 말없이 곁을 지켜주었다. 김 씨는 부대찌개 가게 문을 열었던 12년 전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 일을 안 했으면 미쳤겠죠. 일에 빠져 지내다보면 잘 시간이 왔으니까요. 부대찌개 팔아서 한 푼 두 푼 모아 저번 가게에서 못 준 직원 퇴직금, 결제할 대금을 하나씩 정리했지요. 다 갚는 데 6년이 걸렸습니다.”
친정 앞마당의 추억에서 태어난 부대찌개
김 씨는 유명한 부대찌개 식당에서 비법을 배우지 않았다. 그가 떠올렸던 건 친정아버지가 즐겨 들었던 얼큰한 민물고기 탕이었다. 전북 부안의 친정에는 너른 마당이 있었다.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아버지는 잡아온 민물고기에다 늙은 호박을 척척 부숴 넣어 맛있게 잡쉈다.
김 씨의 부대찌개는 입에 짝짝 붙는 걸쭉하고 느끼한 그런 맛이 아니었다. 손님들은 처음에 ‘이게 부대찌개가 맞느냐’ ‘부대찌개라고 이름은 붙여놓고 맛이 뭐 이러냐’고 항의했다. 하지만 김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녁마다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찌개를 수차례 다시 끓여 맛을 보고 실험하기를 1년여. 화학조미료나 설탕으로 손쉽게 맛을 내고 싶지 않았다. 호박과 양파, 무, 제철 과일로 은은한 단맛, 질리지 않는 단맛을 냈다.
주변 사람들이 그랬다. “사장님 고집 대단해.” 그는 고집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발악한 거라고 했다. “내가 어디 가서 부대찌개를 배웠으면 이 맛과 저 맛이 섞여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예요. 어린 시절 친정 마당 가마솥의 기억만 붙잡고 더듬더듬 찾아갔어요.”
‘탱글탱글한 소시지와 햄, 깔끔하고 개운한 국물’ ‘향이 진하고 쫄깃한 햄’ ‘먹고 난 뒤에도 배 속이 편안한 식당’…. 손님들은 주저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먹거리 X파일 팀에서 취재를 온다고 했을 때 그의 남편이 그랬단다. “그거 고발 프로그램이야. 이 사람아, 어쩌려고 그래.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어.” 김 씨는 “모르고 죄를 지을 수는 있어. 알고 죄 짓는 게 나쁜 거지”라고 답하고는 취재에 응했다.
예상치 않게 ‘착한식당’에 선정된 뒤 하루 최고 매출이 1000만 원을 찍은 날도 있다. 임신부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줄지어 식당을 찾자 김 씨는 부대찌개를 끓이는 가스 설비를 인덕션으로 모두 교체했다. 가스가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어서란다.
햄만 바라보기
원래 가게 이름은 ‘그릴 마이스터’였다. 어느 날 행인이 “저 집은 도대체 뭐하는 집이야”라고 무심코 한 말이 김 씨에겐 충격이었다. 시인인 친구에게 가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다. 친구는 곧바로 냅킨에 ‘햄바라기’라고 썼다. “바라기는 여기만 바라보라는 뜻이야. 넌 햄을 직접 만드니까 햄바라기 어때?” 그게 8년 전 일이다.
그는 예전부터 1남 2녀에게 세뇌를 시켰다. 엄마는 대를 물릴 일을 할 거라고. 큰딸(29)은 완벽을 추구하는 엄마를 힘들어하다 두 차례 도망을 가더니 최근 햄바라기 산본점을 책임지고 나섰다. 다른 회사를 다니는 둘째 딸(27)은 조만간 마케팅 담당자로 햄바라기에 합류할 예정이다.
“언제부터인지 손님들이 자식이 됐어요. 이 가게를 차릴 때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왔는데 두 딸을 대학 졸업시키고, 내가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해준 게 손님들이거든요. 자꾸 좋은 식재료를 찾고 정갈하게 차리고 싶게 해요. 이 가게와 손님들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돼 있더라고요, 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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