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동결 조치는 화폐개혁보다 더 비밀 엄수가 생명이다. 화폐개혁이야 만에 하나 새어 나가더라도 철회하면 그만이지만 사채 동결은 시장이 뭔가 수상하다는 낌새를 챌 경우 사채업자들이 동시다발로 기업에서 돈을 빼낼 것이어서 경제가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경제 원로들의 육성 증언을 묶은 책 ‘코리안 미러클’에 소개된 김용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보좌관의 말을 압축한다.
‘나중에 법안을 다 만들어 복사를 해야 하는데 만에 하나 복사기가 고장 날 경우 사람을 부르면 보안이 깨질 우려가 있어 아예 복사기를 분해해 자체적으로 수리할 수 있도록 재조립하는 도상훈련까지 했다. 8·3조치를 전혀 몰랐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만약 쿠데타 모의였으면 어쩔 뻔했느냐”며 국내 정치 담당 라인을 모조리 바꾸기도 했다.’
8·3조치의 최대 수혜자는 기업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빚을 해결해 주었으니 이보다 더 큰 특혜가 없었다.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이 조치에 대해 지금의 기준으로 원론적 수준의 비판을 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장기 자금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금융 인프라 자체가 없었던 상황에서 터져 나온 부득이하고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8·3조치 후 기업들의 재무건전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그 뒤 닥친 73년의 제1차 오일쇼크를 견뎌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8·3조치의 성과는 1972년 하반기부터 경제 전반에 스며들어 특히 수출이 급격히 늘었다. 1973년 1분기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78%나 증가한 것. 여기에 제조업이 30.8%, 국내 고정투자가 16.2%나 늘어 1973년 1분기 국민총생산은 전년 동기 대비 19.0%의 높은 실질성장률을 기록해 전년 동기 실질성장률 6.4%를 크게 상회했다. 침체되었던 경기를 단번에 회복시켜 1970년 이래 둔화되었던 경제 성장을 다시 고성장의 궤도에 오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중산층의 소득을 기업에 몰아준 가장 극단적인 대기업 살리기였다는 점에서 비판론도 강하다. 무엇보다 막상 사채 신고를 받아보니 악덕 기업인들의 ‘위장 사채’가 횡행해 충격을 주었다. ‘코리안 미러클’ 중 한 대목이다.
‘부도 위기라고 아우성치던 기업들이 적지 않게 출자자 본인이나 가족 친족 등 특수 관계인이 자기 회사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간 ‘자기 사채‘를 놓은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총 신고 사채 금액의 3분의 1이나 되는 1137억 원이나 됐다. 박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냈으나 긴급명령에는 따로 처벌규정을 두지 않아 처벌할 방법이 없었다. 1억 원 이상의 위장 사채를 가진 유명 대기업 등 10여 개 업체에 대해 향후 일체의 정책지원을 중단하는 조치를 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다 보니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잘사는 풍토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그때도 많았다.
경향신문 72년 8월 17일자 사설이다.
‘많은 기업인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어떤 점에서는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은 일부 기업인이 정부로부터 외화, 자금, 조세 등에 있어 갖가지 특혜를 받고 갖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은 끝에 재산을 은폐하고 기업은 부실화하여 은행에 부실 기업을 떠맡기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8·3조치의 희생자들은 중산층이었다. 동아일보는 72년 8월 5일자에서 ‘본사 취재망에 비친 전국의 사채동결 파장’이란 제목으로 8·3 쇼크에 빠진 중산층을 조명한다. 한푼 두푼 아껴 목돈을 마련하려던 주부들의 희망이 깨지고 집 장만에 부풀어 있던 가장들의 꿈이 깨지는 현장이 잘 담겨 있다.
‘대구시내 S국민학교 황모 교사(51)는 32년간 교사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 480여만 원을 마련, 집을 사려 했으나 자녀들의 교육비 마련 등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전셋집을 전전하면서 시내 굴지 회사에 넣어 500만 원이 되면 찾아내어 숙원의 집을 마련할 꿈을 키워 왔는데 그만 동결이 되어버려 내 집 마련의 꿈이 깨진 것은 물론 4남매의 학비 마련도 어렵게 됐다고.’
‘충북도청 김모 양(35)은 3년 거치 기간 동안 결혼도 어쩔 수 없이 늦춰지게 되었다고 하소연했는데 김 양은 결혼자금을 마련키 위해 푼푼이 든 계가 깨진다는 통고를 받고 한때 실신하기도.’
‘부산 동래구 민락동 하모 여인(42)은 집을 300만 원에 팔아 전셋집으로 옮긴 뒤 섬유회사에 200만 원을 월 4% 이자로 빌려주고 월 8만 원의 이자를 받아 이 돈으로 일곱 식구의 생계와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 등에 다니는 네 자매의 학비를 대왔는데 이젠 2만7000원밖에 이자를 못 받게 되어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고 한탄.’
이들의 하소연을 읽다보면 한국 대기업의 역사는 국민의 땀과 희생을 발판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8년 펴낸 ‘한국사회와 관료적 권위주의’(문학과 지성사)라는 책에서 ‘8·3조치가 (경제 불황 극복이라는) 분명한 효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를 관통하는 정경유착의 기본 유형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비정상적 방법으로 미증유의 특혜를 이들에게 부여함으로써 대기업과 국가 관료제의 연합을 선명히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8·3조치와 같은 대기업 육성정책은 우리나라 독점적 재벌경제를 형성하는 발판을 마련해준다.
8·3 조치의 긍정적 효과가 어떠했든 한국의 재벌이 중산층의 희생을 바탕으로 오늘날에 이르렀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재 수사 중인 CJ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것이 진정 자본주의 질서를 따르는 기업가의 본모습인지 국민들이 한탄과 절망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한국 재벌들은 자신들의 현재 위치가 기업 오너들의 창의정신과 도전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에는 어려울 때마다 국민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들이 요즘 말하는 사회공헌이라는 것도 시혜가 아니라 국민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 기업인들 중에서 이런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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