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를 쓰다… ‘타는 목마름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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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45>도피

결혼 전 함께 찍은 김지하 시인과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 김지하 제공
결혼 전 함께 찍은 김지하 시인과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 김지하 제공
10월 유신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통령 특별선언이 나온 지 일주일 만인 10월 27일 해산 국회를 대신하는 비상국무회의가 열려 새 개헌안을 의결했다. ‘유신헌법’은 11월 21일 계엄하에 국민투표에 부쳐져 절대 다수(91.5%)의 찬성을 얻어 확정된다.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연장되었고 중임(重任) 제한은 철폐되었다. 선출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선제로 바뀌었다. 여기에 국회해산권, 국회의원 3분의 1 지명권, 법관 임면권뿐 아니라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수 있는 비상대권까지 대통령이 쥐게 된다.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대의원들로 구성된 첫 ‘통일주체국민회의’(의장 대통령)가 1972년 12월 2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있었다. 투표용지에는 박정희 후보 한 명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대의원 2359명 전원이 참가한 이날 투표에서 박 후보는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사람들이 훗날 ‘체육관 선거’라 비아냥댄 이 대통령 간접선거는 이후 전두환 대통령 시대까지 이어지다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직접선거로 바뀐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4일 뒤인 72년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로써 신민당 김대중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당선된 7대 대통령 임기는 1년 5개월 만에 끝나게 된다.

유신헌법 조문이 조목조목 발표되던 72년 10월 17일 김지하는 서울에 있었다. ‘월간 대화’(1976년 11월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창간한 잡지, 77년 10월 폐간) 응접실에서 당시 야당 당수인 유진산과 박 대통령의 밀착을 호되게 공격하는 성토문을 쓰던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유신 발표에 깜짝 놀랐다.

그는 더이상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원주로 가기 위해서였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는 항만과 도로와 공항 등이 모두 봉쇄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김지하는 미아리 고개 근처에서 원주행을 포기했다. 어디로 갈까 하다 인근에 있는 정릉 박경리 선생 댁이 생각났다. 김지하는 택시를 돌려 박 선생 집으로 찾아갔다. 박 선생은 딸 김영주와 함께 있었다.

김지하는 “며칠만 피해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박 선생은 “김 시인을 숨겨주었다는 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우리 모녀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거절했다. 맞는 말이었다. 김지하가 미안한 마음으로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딸 김영주가 어머니인 박 선생께 이렇게 맞받았다.

“갈 곳도 없고 피할 곳도 없어 위태로워 어렵게 찾아온 사람을 어떻게 그리 모질게 거절하세요? 며칠만 묵어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딸의 돌연한 반항(?)에도 아랑곳없이 박 선생은 “숨겨줄 수 없다”며 도리질 쳤다. 그런 어머니와 딸 사이에 작은 승강이가 벌어졌다. 김지하는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서울에 친구들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 나왔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터덜터덜 정릉 길을 내려오는데 다급하게 뒤쫓아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김영주였다. 그는 김지하 앞에 서더니 “정릉 입구까지, 택시 탈 때까지 바래다 드리겠다”고 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김지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걸었다. 김영주는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어머니를 용서하세요. 혼자서 긴 세월을 힘들게 살아오셔서 그래요. 이해해 주십시오.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김지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떠나는 차 안에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김영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득 차올랐다.

김영주 현 토지문화관 이사장도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택시 타는 모습을 외등 밑에서 보면서 ‘참 불쌍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청혼도 받아들이게 된 것인데… 인간적 연민에서라고 할까, 제 팔자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태어날 때 조부께서 저를 ‘복덩이’라고 하셨다는데 제 복의 절반만 나눠 주자,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든, 10월 유신은 그렇지 않아도 굴곡 많던 김지하의 삶을 한없는 질곡으로 몰아넣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유신 선포 날, 그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인연을 만났으니 이것이야말로 삶의 아이러니 아닌가.

김지하는 당국의 눈을 피해 서울에서 며칠 떠돈다.

그리고 어느 날 여관방에서 자고, 다음 날 새벽 친구 집으로 도피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을 때 어스름 새벽녘 누군가가 벽에 분필로 써 놓은 커다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민주주의 만세’라는 글귀였다. 그는 머리에 화인이 찍힌 듯 큰 충격을 받는다.

김지하는 그날 원주로 내려가면서 새벽에 머릿속에 입력해 놓았던 ‘민주주의 만세’ 구절을 내내 외웠다. 1970년대 그의 기념비적 작품이자 대표적 저항시 ‘타는 목마름으로’는 이렇게 탄생했다. 시의 전문이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지하#타는 목마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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