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당국회담 수석대표의 급을 놓고 거센 샅바싸움을 벌인 핵심에는 북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있다. 정부는 9일 판문점 실무접촉에서 ‘통-통(통일부-통일전선부장)’ 라인 간 회담을 제안하며 김 부장의 참석을 요구했지만 북한 측이 완강히 거부하면서 이른바 ‘격(格)의 싸움’이 본격화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12일 국회 본회의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대화라는 것은 격이 맞아 서로 수용해야지 일방적으로 굴욕을 당하는 대화는 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정 총리는 “수석대표 문제를 양보해서라도 회담을 성사시켰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심도 생각해 주면 좋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무한대로, 일방적으로 (북한에) 양보했지만 이제는 남북이 격에 맞는 대화를 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 격 떨어지는 북한의 수석대표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이날 당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남북 양측이 미리 직급 대조표를 만들고 회담의 중요도에 따라 수석대표를 미리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2000∼2007년 개최됐던 1∼21차 남북 장관급회담에 참가했던 남측 수석대표는 모두 6명. 박재규 홍순영 정세현 정동영 이종석 이재정 등 모두 통일부 장관이다. 반면 상대방으로 나온 북한 수석대표는 내각 책임참사라는 직함을 썼지만 실제 맡고 있는 업무나 격은 장관급에 턱없이 부족했다.
1∼4차 장관급회담 수석대표로 나온 전금진은 당시 통일전선부 부부장. 노동당 산하 전문 부서인 통전부가 남측 통일부의 상대인 만큼 통전부 부부장은 차관급에 해당한다. 5∼13차 북측 수석대표는 조국평화통일위(조평통)의 김령성 서기국 제1부국장이었다. 김 부국장은 한국의 국장∼차관보급에 걸쳐 있는 직위라는 평가도 있지만 조평통이 당의 외곽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장관급인 한국 수석대표와 비교하면 격이 한참 떨어진다.
○ ‘통-통’ 라인 동의했던 김양건의 변심
김양건 부장은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 옆에 혼자만 배석했다. 맞은편의 노무현 대통령 옆에는 권오규 경제부총리, 이재정 통일부 장관,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 등 4명이 앉았다. 일부 전문가와 야권 일각에서는 이를 들어 “통일전선부장이 최고지도자에 대해 갖는 영향력과 부여받은 신임이 한국의 통일부 장관보다는 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당(黨) 국가체제인 북한의 특수한 체제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김양건의 격을 너무 높게 볼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김 부장은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비밀접촉을 갖고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하면서 ‘통-통’ 라인을 통한 업무 공식화에 동의한 당사자다. 같은 해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단으로 서울에 내려와서는 임태희 장관과 밤늦게 양주를 마시며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는 “그때는 북한이 (쌀과 비료 등) 거액의 지원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만큼 김양건이 아니라 김정일 위원장이라도 나왔을 분위기”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결국 문제는 단지 수석대표의 급이 아니라 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의도와 태도”라고 지적했다. 북한이 과거 남한이 회담 진행을 위해 용인해 준 ‘잘못된 격과 급’에 집착해 오기를 부리다 이번 회담의 기회를 걷어찼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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