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종북세력에 대응 안하면 국정원 없어져” 댓글 지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5일 03시 00분


■ 檢 ‘국정원 정치-대선 개입’ 수사 발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월례 부서장회의와 매일 아침 브리핑을 통해 사실상 국내 정치 관여 및 선거 개입 지시를 내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사팀이 국정원이 국내 정치 및 선거에 관여했다는 근거로 제시한 내용은 대부분 이념적 갈등이 첨예한 이슈들이다. 개중에는 북한 대남기구 및 이들의 지시를 받는 국내 세력의 사이버 활동에 대응해야 하는 국정원 업무의 한 영역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도 있어서 앞으로 법원에서 치열한 논쟁이 예상된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수사 개입은 그동안 알려졌던 것보다 훨씬 노골적인 양상이었던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국정원 전현직 직원이 내부 정보를 야당에 빼돌린 경위도 밝혀졌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은 14일 원 전 원장을 공직선거법 및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김 전 청장을 직권 남용과 공직선거법, 경찰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각각 불구속 기소했다.

① ‘원세훈 국정원’의 허접스러운 인터넷 댓글 작업

검찰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매달 열리는 전체 부서장 회의에서 각종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각 부서장은 이 지시사항에 대한 세부 이행계획을 세운 뒤 매일 아침 브리핑에서 원 전 원장에게 보고했고, 이후 시행 결과도 함께 보고했다.

원 전 원장이 부서장 회의를 통해 하달한 내용들이 국내 정치 관여 지시에 해당한다는 게 수사팀의 판단이다. 검찰이 예로 든 사례는 이렇다. 원 전 원장은 2010년 1월 “세종시 등 국정 현안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좌파단체들이 많은데 정공법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좌파 교육감들이 주장하는 무상급식 문제에 대해 포퓰리즘적 허구성을 국민에게 적극 홍보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1월엔 “주택시장 침체 등은 지난 정부의 정책 과오에서 비롯됐고 현 정부가 바로잡으려 해도 야당에서 반대하는 상황임을 국민에게 정확히 알려주라”고 지시했다.

수사팀은 선거 개입을 지시하는 발언도 다수 있었다고 밝혔다. 원 전 원장은 “지방선거도 이제 있고 좌파들이 여기 자생적인 좌파도 아니고 북한 지령 받고 움직이는 사람들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에 대한 확실한 싸움을 해서…”(2010년 1월)라거나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서 다시 정권을 잡으려고 하고…우리 국정원은 금년에 잘못 싸우면 없어지는 거야”(지난해 2월)라고 말하기도 했다. 총선 후인 지난해 6월엔 “종북좌파 척결은 물론이고 그 동조세력도 면밀히 점검하고, 종북좌파 세력이 국회에 다수 진출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우리 사회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원 전 원장은 2009년 3월 심리전단을 독립 부서로 만든 뒤 이후 4개 팀 70여 명으로 확대 개편했다. 2010년 4월∼지난해 12월 이들이 작성한 게시글과 찬반클릭 수는 각각 5333건과 5169건이다. 게시글 가운데 선거 관련 글은 230건이었는데 이 중 73건이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야당 후보를 반대하는 취지의 글이라고 수사팀은 분류했다. 이 가운데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을 반대하는 글이 각각 37건과 32건이었고, 안철수 후보를 반대하는 글이 4건이었다.

이런 댓글 활동이 수사팀이 주장하는 대로 원 전 원장의 지시에 의해 선거 개입의 의도로 이뤄졌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문제다. 하지만 선거 개입인지 아닌지를 떠나 국가 정보기관이 무려 70명에 이르는 인력을 갖고 이런 수준의 활동을 하는 조직을 운용했다는 것 자체가 실망스럽고 한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사팀 관계자는 “원 전 원장은 북한의 동조를 받는 정책이나 의견을 가진 사람과 단체도 모두 종북세력으로 보는 그릇된 인식을 갖고 국정원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불법적인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이나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 그 외의 심리전단 직원은 모두 원 전 원장의 지시에 따랐다고 보고 기소 유예했다.

② 김용판 전 청장의 은폐·축소

지난해 대선 3일 전인 12월 16일 오후 11시 서울지방경찰청이 ‘(국정원 여직원 김모 씨가) 박근혜·문재인 지지·비방 내용의 게시글·댓글을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중간 수사 결과를 갑자기 발표했다. 이 발표가 김 전 청장의 은폐·축소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는 게 수사팀의 결론이다.

당시 사이버범죄수사대 디지털증거분석팀은 국정원 직원 김 씨의 노트북 문서파일을 복구해 ‘오늘의 유머’ 사이트 게시물 운영·관리 방식과 게시물 선정 및 저지 방법, 30여 개의 ID, 닉네임, 비밀번호 등이 담겨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뽐뿌’ ‘보배드림’ ‘SLR클럽’ 등 인터넷 사이트의 이름과 김 씨를 도왔던 이모 씨 명의로 개설된 ID와 닉네임 등도 있었다. 이들 ID가 게시글 작성과 찬반 클릭에 사용된 점도 확인됐다. 분석팀은 김 씨가 ‘오늘의 유머’에 “저는 이번에 박근혜를 찍습니다”라는 글과 ‘목 내놓고 금강산 가기 싫다’는 제목으로 문재인 후보에게 반대하는 취지의 글을 올린 사실도 확인했다.

분석관들은 이 내용을 100여 쪽 분량으로 프린트하고 증거분석 요약은 수기(手記)로 만들어 보고했다. 컴퓨터 기록이 남지 않도록 하라는 김 전 청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김 전 청장은 또 서울지방경찰청 수사부장 등에게 “수서서에 증거분석 결과를 넘겨주지도, 알려주지도 말라”고 지시했다. 또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을 해소해주는 발표 방안을 강구하라”고 했으며 이광석 당시 수서경찰서장에게 축소된 분석 결과가 들어 있는 보도자료를 배포한 후 브리핑하라고 지시했다.

분석관들은 분석 초기, 문제의 ID·닉네임 등을 찾았을 때는 서로 기뻐하다가 김 전 청장이 은폐 지침을 내린 뒤 “실제적으로 이것은 언론 보도에는 안 나가야 하는 것 아냐” “보고를 하더라도 언론 보도에는 포함되지 않게 하자”라는 대화를 나눈 것으로 폐쇄회로(CC)TV 영상 등을 통해 확인됐다. 일부 분석관은 상부 지시대로 작성된 증거분석 결과 보고서에 서명을 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③ 야당에 정보 빼돌린 국정원 전현직 직원

검찰은 민주당에 심리전단 관련 정보를 누설한 혐의로 국정원 전 간부급 직원 김모 씨와 평직원 정모 씨도 선거법 등을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다. 2009년 국정원에서 명예퇴직한 김 씨는 지난해 총선에서 경기 시흥갑 민주당 예비후보로 등록했다가 낙천했다. 김 씨는 지난해 11월 민주당 관계자로부터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민주당과 문 후보를 비방하는 게시글을 올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당시 국정원에서 근무하던 정 씨에게 관련 정보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수사팀은 민주당 관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김 씨가 밝히길 거부해 파악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정 씨는 여직원 김 씨의 신상 정보와 직접 미행해 파악한 집 주소까지 알려줬다. 이 사실이 발각돼 파면 위기에 처한 정 씨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일부를 손으로 베껴 민주당에 유출했다. 하지만 원장 말씀자료 중 “선거철이니 개입하지 마라”는 표현 등은 빼고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3월 18일 민주당 진선미 의원의 기자회견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최창봉·최예나 기자 ceric@donga.com
#원세훈#국정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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