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김지하와의 인연을 취재하기 위해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만났을 때 ‘유신에 대한 평가’를 물은 적이 있다. DJ정부 때 국정원장을 하고 박정희 시대에는 민주인사를 도왔던 사람이니 비판이 강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답은 의외였다.
“유신은 잘못됐지만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다. 당시 우리는 북한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꿀렸다. 앞서기 시작한 것은 74년, 75년이다. 북한은 위협 그 자체였다. 게다가 미중관계가 개선되고 75년엔 베트남이 패망한다. 유신이라는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전 원장은 “여기에 3선 개헌 이후 야당이 제기한 장관해임안에 대해 공화당 일부 의원이 동조해 가결된 공화당 내 항명파동과 DJ라는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의 등장 등 박 대통령의 리더십도 밖에서 보는 것처럼 견고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밖으로는 안보 위협에, 안으로는 조직 관리 필요성이 제기됐다. 역사에 가정이라는 게 무의미하지만 유신을 안 했더라면 박 대통령은 물러나고 잊혀진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하던 사업들은 다 흐지부지되고 경제도 도약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신이 어떤 면에서 추동력을 만든 거다. 모든 에너지를 한꺼번에 집중시켜 엔진 역할을 한 거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아니지만 긴 역사를 통해 볼 때 유신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발전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어 “돌이켜 보면 박정희 시대에 인권 탄압, 독재, 헌법 훼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본다. DJ도 ‘박 대통령 잘못이 있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준 것은 큰 소득’이라고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했다.
‘유신과 중화학공업’을 쓴 김형아 교수도 “결국 박정희의 유신 체제는 한국이 고도 경제 성장을 위해 치렀던 대가”라고 평한다. 이런 점에서 중화학공업화는 유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관계가 있다. 1996년 10월 김형아 교수와 인터뷰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의 말이다.
“박 대통령 때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화와 유신 개혁을 별개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었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였다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다.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이 계획대로 정확하게 시행되도록 국가를 훈련시켰다. 유신이 없었다면, 대통령은 그런 식으로 국가를 훈련시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 남덕우 총리도 회고록에서 “국내외 경제학자들과 언론들은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 때문에 한국 경제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댔다…그러나 만약 그때 중화학공업을 추진하지 않았으면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됐을까…중화학공업 건설은 경제적 타산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일본 정부도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던 1950년대 초 중앙은행과 경제 전문가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당했다”고 했다.
지금이야 ‘중화학공업이 없었으면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중화학공업 추진은 10·26으로 박 대통령이 급서하자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었다. 박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이룬 공적이 막판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로 몽땅 날아가 버렸다는 말까지 나왔다. 실무 총책이었던 오원철 수석은 80년 신군부가 들어서자 경제를 망쳤다는 죄목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되는 고초를 겪기까지 했다. 이랬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구조조정을 거쳐 한국 경제가 1980년대 중반 새롭게 도약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회평론가이자 소설가 복거일은 기자에게 “과잉투자였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하지만 시장에 존재하지 않을 때는 어떡하느냐”며 “박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추진은 애플의 아이폰처럼 시장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든 ‘마켓 디자인’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도 말했다.
박 대통령 경제개발 방식을 경제에 모든 것을 집중한 ‘경제 집중화(economic centralization)’라고 표현한 황병태 전 주중대사는 “경제 성장 속도가 무대 설치자인 박대통령조차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며 “경제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경제 이외의 사회개혁 요구와 흐름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낮춰 보려는 데서 박 대통령의 비극이 시작되었다”(‘박정희 패러다임’)고 말한다.
하지만 굳이 ‘유신’ 같은 공포정치를 동원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도 많다. 이장규의 말(대통령의 경제학)이다.
‘유신이 아니어도 3선 개헌으로 1975년까지 대통령을 하게 돼 있었다. 그랬으면 그의 집권은 1961년부터 따져 14년간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중화학공업 진척이 다소 늦어졌다 해도 경제정책뿐 아니라 국정운영이 합리적으로 균형 있게 전개됐을 가능성이 컸다고도 볼 수 있다.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주로 유신체제 중의 지나친 억압 정치의 폐해에 쏠려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3연임을 마지막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했더라면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생전 박정희 대통령도 경제 건설의 마지막 단계로 민주사회 정착을 상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황병태의 ‘박정희 패러다임’에 나오는 부분이다.
‘박 대통령 집권기간의 마지막 경제 부총리였던 고 남덕우 증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유신 말기에 그에게 “이제 유신체제가 한계에 다다라 다음 단계인 민주사회 건설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 김정렴 비서실장도 최근 자서전에서 “박 대통령이 유신시대를 마감하고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정치인들이 민주적 선거에서 경쟁하는 민주 국가로 옮겨가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어떻든, 이제 유신에 대한 평가를 마무리할 시점이다.
유신 비판론자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지적한다. 또 불가피성이나 긍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위협과 이후 한국의 경제적 성취를 부각시킨다.
유신이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오고 희생자를 양산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하지만 폴 케네디, 헨리 키신저, 앨빈 토플러 같은 석학들도 ‘개발도상국들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룰 수 없는데 박정희의 성취는 세계 유일의 성공 사례’라고 이구동성으로 박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덩샤오핑(鄧小平), 블라디미르 푸틴, 리콴유(李光耀) 등이 박정희를 롤모델로 존경한다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역사를 대하며 우리는 좌우이념을 적용한 선악의 이분법보다는 공과 과를 균형적으로 취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평가는 저널리즘보다는 사가(史家)들의 몫이므로 유신평가는 이 정도로 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박 대통령은 ‘유신’으로 정권의 국내외적 위기를 정면 돌파해 가고 중화학공업에 박차를 가하지만 그 속도에 비례해 정권 붕괴 요인들도 빠르게 커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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