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물살을 타던 대화국면이 순식간에 냉기류로 돌아섰다. 5월 14일 이지마 이사오 일본 특명담당 내각관방 참여(총리 자문역) 방북, 5월 22일 최룡해 북한 총정치국장 방중, 6월 7일 미·중 정상회담과 남북 당국회담 실무접촉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던 북핵 관련 외교행보가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서울을 찍고 워싱턴으로 향해 핵·경제 병진노선의 기반을 얻어내겠다’는 북측 로드맵이 도입부부터 꼬여버린 상황이다.
그러나 남북회담 실무에 오랜 기간 종사했던 전직 당국자는 “평양의 국면 운영 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길게 보자면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라고 촌평했다. 경제개발이 다급한 평양 못지않게 한국이나 미국 역시 쫓기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양국 정책결정자들의 뒷덜미를 바싹 쫓는 것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북한의 핵물질 생산능력이다.
먼저 현황부터 살펴보자. 한미 정부당국과 전문가들은 대체로 북한이 핵무기 10기 남짓을 만들 수 있는 핵물질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1986년부터 제네바 합의가 만들어진 94년 4월까지, 다시 2003년 2월부터 재가동해 2·13 합의가 나왔던 2007년 7월까지 영변 단지의 5MWe 흑연로를 가동해 얻은 플루토늄은 44~50kg이다. 핵무기 1기에 필요한 플루토늄 양은 통상 3kg 내외. 영변에서 나온 핵물질에서 세 차례 핵실험을 하느라 사용한 플루토늄을 제외하면 핵무기 11~13기를 만들 수 있는 양이 남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눈앞에 닥친 핵 공포 현실
북한이 핵무기 생산능력을 입증한 데다 이미 10여 기를 만들어놓았다면,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그러나 핵무기 종류와 사용방식에 대한 강대국들의 경험을 대입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용 가능한 핵폭탄 수량이 일정량을 넘어서면 그에 따라 구성할 수 있는 군사전략이 달라지고, 거꾸로 이를 억제하거나 제압하는 데도 근본적으로 다른 고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북측이 건설 중이던 50MWe 흑연로와 태천의 200MWe 흑연로는 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사실상 방치돼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지만, 문제의 5MWe 흑연료는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4월 2일 북한은 2007년 이래 가동이 중단됐던 이 흑연로를 재가동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한미 양국의 신경을 더욱 자극하는 것은 2010년 11월 북측이 공개한 영변의 우라늄 농축시설과 새로운 실험용 경수로다. 이들 시설은 5MWe 흑연로 하나만 가동하던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핵 능력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의 초청을 받아 시설을 둘러본 지크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원래 100MWe 규모로 설계된 실험용 경수로의 실제 열출력은 30% 정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에 따라 주변국 정보당국과 전문가들은 이 새로운 경수로를 통상 30MWe 경수로라고 부른다. 저명한 핵 과학자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은 2012년 8월 보고서를 통해 “이 경수로에서 태우고 남은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면 무기화가 가능한 플루토늄을 매년 최대 20kg까지 생산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매년 핵무기를 7~8개씩 새로 만들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우려는 이내 현실이 되고 있다. 6월 3일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한미연구소가 운영하는 북한 동향 정보사이트 ‘38노스’는 5월 22일 촬영된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사진 속 영변 핵시설 모습은 기존 5MWe 흑연로 보수공사와 새 경수로 건설공사가 상당한 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5MWe의 경우 재가동 준비작업이 거의 마무리돼 1~2개월 후면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고, 30MWe 경수로 역시 내부작업이 대부분 끝나 시험기간을 거치면 가동을 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영변의 우라늄 농축시설과 아직 공개되지 않은 비밀 농축시설에서 2012년 이후 매년 2~3기 분량의 우라늄을 추가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올브라이트 소장은 분석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북한은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합해 2016년까지 최대 48기 분량의 핵물질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박근혜 정부와 오바마 행정부가 끝나기도 전인 불과 3년 뒤 ‘가까운 미래’다.
귀하디귀한 핵무기 재료가 이처럼 넉넉해지면, 북한은 이제까지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다양한 종류의 핵무기를 자유자재로 개발, 실험할 수 있게 된다. 플루토늄 폭탄이 폭발할 때 2중수소와 3중수소의 융합반응을 일으켜 위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증폭핵분열탄이 대표적이다. 거꾸로 국지전에 활용할 수 있는 전술핵을 만드는 작업에 도전할 수도 있다. 2~4월 긴장고조 국면에서 평양이 강조해온 ‘다종화·소형화·경량화’라는 말이 단순한 엄포나 빈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핵무기 종류가 다양해지면 핵전략의 종류나 군사적 활용도가 비약적으로 커진다. 증폭핵분열 같은 기술적 진보로 탄두 중량이 줄면 스커드·노동 등 신뢰할 수 있는 미사일 기술을 기반으로 만든 대륙간탄도탄(ICBM) 등에 탑재하는 일이 쉬워지고, 2010년 연평도 포격 같은 국지분쟁에서 전술핵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해진다. 궁극적으로는 유사시 북한 핵무기를 일거에 제압하는 일이 난관에 부딪힌다. 핵무기 10여 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수량이 50기 가까이 늘어난다면 어려움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게 군 정보당국자들의 설명이다. 만약 선을 넘으면
만일 이러한 핵 능력 강화가 이후에도 장기간 지속되면 워싱턴의 방침도 선회할 수밖에 없다. 케네디 행정부 국방부 장관이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특정 국가와 핵 억제(deterrence)를 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핵무기 수량에 대해 “상대방 전체 인구의 20~25%를 살상하고 산업시설의 50%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흔히 ‘맥나마라 독트린’이라고 불리는 이 수치는 이후 미국 핵전략의 기준이 됐다. 지금의 워싱턴은 소규모 핵폭탄만으로 미국과의 핵 억제를 말하는 평양 측 주장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지만, 북한의 핵무기 수량이 이 선을 넘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 북핵에 대해 ‘존재 자체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면, 그래서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사이에 형성됐던 ‘상호확증파괴’의 균형이 이뤄졌다고 판단하면, 워싱턴으로서도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거나 그에 준하는 조치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최악의 시나리오라 할 이러한 상황 전개는 소련과 중국의 핵개발 과정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평양이 꿈꾸는 최상의 미래다.
북한 핵 문제는 멈춰서 있는 기차가 아니다. 특히 2007년 2·13 합의 이후 공사가 중단됐던 주요 핵물질 생산시설이 완성 단계에 들어선 현재로서는 더욱 그렇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할 테고, 한국과 미국의 해법은 그 폭이 급속도로 줄어든다. 생산시설 동결이나 실험 중단 같은 이른바 ‘단기적 해법’이라도 긴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시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째깍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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