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납치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여가 지난 1973년 10월 19일 중앙정보부가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간첩 혐의로 구속된 후 혐의 사실을 자백한 뒤 창밖으로 투신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최 교수는 10월 16일 오후 2시 중앙정보부에서 수사 중이던 간첩 사건에 대해 수사 협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결백을 입증하겠다며 자진해서 정보부를 찾아가 조사를 받고 있던 터였다. 그러다가 정보부 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정보부는 “최 교수가 국내 간첩조직망에 대한 여죄를 조사받던 중 용변을 보겠다고 변소에 간 뒤 7층 변소 창문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와 최근의 학원 사태와는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보부는 투신했다는 현장도 공개하지 않고 부검도 완강히 거부했다. 정보부의 태도는 고문에 의한 타살을 은폐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의심을 받게 했다.
서울대 법대는 물론이고 대학가가 발칵 뒤집혔다. 최 교수는 유신을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전국 주요 대학으로 급속하게 파급되어 가던 와중에 평소 시위 참여 학생들에게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 주었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1955년 서울대 법대를 거쳐 대학원을 마친 뒤 1957년 스위스 취리히대로 유학을 떠났다. 1961년 독일 쾰른대에서 한국인 최초로 독일 법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33세의 나이로 1964년 8월 서울대 법대 교수가 된다.
그는 10년이 채 안 되는 재직 기간에 60여 편의 연구논문을 쓰면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대학 강의실에 프락치들이 들어와 교수와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경찰을 비롯한 기관원들이 학교 안까지 들어와 학생들을 때리고 잡아가던 시절, 1967년부터 도서관장과 학생과장 등의 보직을 맡으면서 이런 현실에 가슴 아파했다. 그는 시위하는 학생들이나 도서관에서 농성하는 제자들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10·2시위 이틀 뒤인 10월 4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이 문리대에 이어 유신반대 데모에 나섰다가 구금되자 열린 긴급교수회의에서 최 교수는 “학생들의 행동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 스승으로서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이 있고 난 후 10여 일 뒤에 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가 숨졌다고 발표한 6일 뒤인 10월 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면서 최 교수가 여기에 포함되었다며 3명을 구속하고 17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31명에게 경고조치를 했다고 발표한다.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유럽 유학이나 출장을 다녀온 학자와 공무원들로 유럽에서 북한 공작원과 연계해 간첩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최 교수의 경우 간첩단 총책 이재원에게 간첩으로 포섭되어 입북하여 미화 1000달러를 받고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매년 2회씩 활동 상황을 보고했으며 1970년 미국 체류 중에 북한 공작원과 접촉했다는 것이었다.
최 교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교수, 사제단, 재야 인권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요구가 높았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이듬해 1974년 12월 명동성당 추모미사에서 ‘최종길 교수와 떠난 모든 형제를 위한 추모 미사’를 열고 최 교수가 전기고문 도중 조작 실수로 심장파열을 일으켜 사망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를 상대로 진상규명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에도 서울대 법대 학생회를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준비되었으나 5·17 쿠데타로 또다시 무산됐다.
그러다 2002년 5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 자체가 당시 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밝히면서 최 교수의 억울함도 그제야 풀렸다. 위원회는 “최 교수는 정보부의 고문과 협박 등 각종 불법수사에도 불구하고 강요된 간첩 자백을 하지 않았다. 적극적 항거 외에 권위주의적 공권력 행사에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행위도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활동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만큼 최 교수 죽음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결론지었다.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항소를 거쳐 2006년 2월 14일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국가가 유족에게 18억4800여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당시 법원은 “국가권력이 나서서 서류를 조작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피해자를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사건에서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법무부는 상고를 포기해 항소심 판결이 확정됐다.
‘간첩’으로 몰렸던 최 교수는 애당초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공이 사유재산제도의 기초를 탐구하는 ‘물권법’이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2004년 김학동 교수(서울시립대 법학부)는 ‘공익과 인권’ 학술지에 고인의 학문과 업적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대학에 계셨던 10년 중 2년은 학생운동이 가장 심한 시기 학생과장을 하셨고 또 2년은 미국 유학을 하셨으니 실제 집필 활동을 한 것은 고작 6년여에 불과하다. 이 짧은 연구 기간 동안 논문 수에서도 그렇지만 학문적 깊이와 열정에 놀란다. 거의 모든 글이 혼연의 힘을 쏟은 것들로서 틀에 박힌 글은 하나도 없다.…선생께서는 현실적인 사회문제 특히 우리 사회에서 점차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물권적기대권’ ‘집합주택(아파트)의 구분소유에 관한 비교법적 실태적 고찰’ ‘서독에 있어서의 사생활보호’ ‘인격권의 사법상의 보호’ ‘소유권유보부 매매의 법률관계에 대한 고찰’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최 교수가 천착했던 ‘인격권’이나 ‘사생활 보호권’ 같은 이슈들은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사회의 뜨거운 논쟁거리로 부상하니 그의 고민이 매우 앞서 나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최 교수의 죽음은 김대중 납치에 이어 1973년도에 일어난 유신 균열의 또 다른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반유신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이 대학가로 확산되고 있었다. 학기말 시험을 앞둔 11월 하순으로 접어들자 기존 동맹휴학 수업거부 운동에서 시험거부 운동으로 전개됐다. 11월 21일 서울대 교양학부생 1200명이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갔으며 다음 날에는 서울대 문리대가 조기방학에 들어갔고 한국외국어대와 춘천 성심여대도 조기 종강에 들어갔다. 12월 초순까지 서울 시내 거의 모든 대학과 지방의 주요 대학들이 시험 거부 또는 시위를 했을 정도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이화여대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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