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전북 순창경찰서 구림지서에서 반공청년단인 일명 민보단장으로 활동한 강모 씨는 1950년 11월 순창서 소속 경찰관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대열에서 혼자 이탈해 구림지서로 복귀하던 중 북한군에 잡혀 총살당했다. 강 씨는 순국반공청년운동유공자로서 국무총리 표창까지 받았다.
강 씨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상 애국단체의 단원으로 전투 중 사망해 전몰군경에 해당된다며 2010년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유족 등록신청을 했다. 보훈처는 “강 씨가 당시 경찰관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가 복귀하는 과정에서 총살됐지만 전투 또는 전투에 준하는 행위 중 사망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워 전몰군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했다. 1심 법원 역시 같은 취지로 강 씨 아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처럼 행정소송을 거치더라도 6·25 때 참전했다가 숨진 사람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는 허다하다. 전국 각급 1심 법원에 따르면 2008년부터 올해 6월까지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다가 보훈처로부터 거부당해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한 사건 43건 중 8건(18%)만 1심에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의 14건 중엔 한 건도 인정받지 못했다.
소송을 통해 참전용사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는 국가유공자의 기준 및 범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해서다. 국가유공자법에 따르면 전투 또는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 중 숨지거나 다친 경우, 공비 소탕 작전 또는 대간첩 작전에 동원돼 임무 중 숨지거나 다쳤을 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망이나 부상이 전투 행위와 연관돼 있다는 점을 기록으로 증명해야 하는데 6·25가 발발한 지 63년이 돼 관련 기록이 소실된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6·25 참전자 전공상에 대한 심사기준’을 마련해 다음 달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새 기준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문서기록이 없고 진술만 있는 경우라도 보훈처가 직접 관련 자료를 보강하고 담당 조사관이 당사자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전우를 찾아 2명 이상의 진술이 일치하면 보훈심사위원회를 거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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