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적이 두려워 피했다면 어느 누가 도와줬겠나. 목숨 바쳐 제 나라 지키는 한국군을 보고 미군 등 유엔군도 전폭 지원했던 것이다.”
정전 60주년과 6·25전쟁 63주년을 맞아 백선엽 예비역 대장(93)은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오늘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많은 피와 고귀한 희생의 대가인지 잊어선 안 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6·25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 1128일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전선을 지키며 공산군과 사투를 벌였다. 전쟁 기간 1사단장과 군단장, 육군참모총장 등을 맡아 군을 지휘했다. 휴전회담의 유엔군 측 초대 한국군 대표도 맡았다.
1시간 남짓한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로 60년 전의 전투 상황과 지명, 인명 등을 어제 일처럼 회고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전후세대가 북한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전 60년, 6·25 발발 63주년을 맞은 소감은….
“참 만감이 교차한다. 정전이 이렇게 오래갈지 누가 예상했겠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세계 최빈국(남한)에 북한의 기습남침은 재앙이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온 국토를 폐허로 만든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적을 일궈낸 것은 국민의 피땀이다. 항상 감사한다.”
―선두에서 부하를 지휘하며 위태로운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1950년 8월 중순 국군 1사단과 미군이 함께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무찌른 다부동전투다. 병력과 무기 모두 열세였지만 무너지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싸웠다. 하루에 700명의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적의 총공세를 막고 방어선을 지켜냈다. 6·25전쟁의 첫 한미 연합작전인 이 전투를 계기로 양국군은 피보다 진한 신뢰를 쌓게 됐다.”
―1군단장 시절 유엔군이 주도한 휴전회담에 초대 한국군 대표로 참석했는데….
“지금도 생생하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의 내봉장(來鳳莊)에서 열린 유엔군과 공산군 측 첫 휴전회담에 100여 명의 외신 취재진이 몰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통일 없는 휴전은 없다’며 반대하는 상황에서 나라를 짓밟은 적군과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착잡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담이 2년여를 끌지 누구도 예상 못했다.”
―회담 분위기는 어땠나.
“첫날 회담 때 양측은 악수나 인사도 하지 않았다. 의자 높이와 좌석 배치 등을 놓고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져 1시간 동안 침묵 속에 서로 쏘아보기도 했다. 한번은 맞은편의 이상조 북한군 소장이 빨간 색연필로 ‘제국주의자의 주구(走狗)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쓴 것을 보여주며 날 자극했지만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최근 남북당국회담이 수석대표의 격(格) 문제로 무산됐다.
“북한이 진정성을 갖고 회담을 제의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목표는 대남 적화이고 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북한이 정전협정 체결 이후 일으킨 숱한 대남 도발 사례가 그 증거 아닌가. 북한의 대남 유화책에 절대 현혹돼선 안 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정전체제를 조속히 평화체제로 전환하자는 주장을 어떻게 보나.
“먼저 상대의 실체부터 똑바로 봐야 한다. 북한의 현 지도부가 바뀌고, 핵을 포기해 대남 위협이 사라져야 평화체제든 협정이든 논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를 무시하고 평화체제 운운하는 건 부적절하다. 북한에 대해 쓸데없는 환상을 가져선 안 된다.”
그는 ‘전후 세대에게 남길 메시지’를 묻자 “지금의 자유와 평화, 풍요를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된다. 자유와 평화는 절대 공짜가 없다. 아울러 북한의 실상을 꿰뚫어보고 안보의 중요성도 간과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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