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사방이 새카맣게 칠해진 0.78평 먹방에 갇히다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68>긴급조치 해제

남들 앞에서 마음껏 통곡도 못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차가 청와대 정문 앞에 이르자 두 손을 얹고 아내와 혼자만의 이별 의식을 치렀다. 동아일보DB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8월 20일 오전 대국민 특별 담화문을 발표한다.

“지난 광복절은 겨레의 축제일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충격과 슬픔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 데 대해 진심으로 국민 여러분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전국에서 남녀노소와 신앙의 구별 없이 모든 국민이 본인의 내상(內喪)에 대해 정중한 조의와 애도의 뜻을 표시해준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에 보답하는 길은 대통령의 직책인 국가보위와 국민의 자유복리증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믿고 이 땅에서 폭력과 빈곤을 몰아내고 사랑과 희망이 가득 찬 행복한 생활을 우리 모두가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성실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박상범 전 경호실장을 인터뷰하면서 그에게 “육 여사 사후 박 대통령께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물었다. 박 전 실장은 “많이 방황하셨던 것 같다. 약주도 좀 많이 하시고…. 몇 번 취하셨을 때는 ‘박 군아, 업어라’ 하셔서 업어드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들 박지만 씨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패기가 많이 약해지신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멍하니 앉아계신 모습도 많이 보았다. 항상 모든 일에 ‘어머니도 보고 계실 것’이란 표현을 많이 쓰셨다. 내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자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고도 하셨다. …(내게는) 사춘기가 그때부터 온 것 같다. 게다가 어머니가 결국 경호 문제로 돌아가신 것이어서 돌아가신 뒤 경호가 무척 엄했다. 그때는 경호란 게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게 하는 것’이어서 어딜 가나 주목을 받고 특별대접을 받는 게 싫었다. 내 친구들까지 나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주의를 받는 것도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급서로 삶이 가장 많이 바뀐 사람은 맏딸 박근혜였다. 당시 딸 근혜는 프랑스에 유학 중이었다. 74년 여름방학 중에 잠시 귀국해 어머니의 얼굴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가 쓴 ‘나의 어머니 육영수’의 한 대목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한동안은 가슴이 뻥 뚫린 듯했다. 마치 가슴이, 심장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팔다리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를 보내다가도 문득 바라본 하늘에 변함없이 찬란하게 떠 있는 태양을 보면 태양은 저리도 변함이 없는데 어머니만 세상에 계시지 않는구나, 차디찬 흙 속에 홀로 누워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퍼스트레이디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남겨진 어머니의 모습에서 힘을 얻으며 지내다가도 문득 어머니가 안계시다는 생각에서 밀려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 던지자. 기왕 공인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라면 기꺼이 나서자 라고 다짐을 하지만 가슴에 뻥 뚫린 어머니의 자리를 쉽게 메울 수는 없었다.’

육 여사의 사망이 박 대통령을 고독하게 만들어 유신 체제를 강화시키는 데 결정타가 됐다는 증언과 주장은 많다. 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육 여사가 그때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박 대통령 통치 스타일은 한결 부드러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심리적 의지처를 잃은 박 대통령의 고독감이 정치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치학자 전인권 씨는 박 대통령에게 육 여사의 존재를 ‘심리적 안식처를 넘어 정치적 리더로 만든 당사자’라고까지 말한다. ‘인간 박정희’를 심리학적 상상력으로 복원한 평전을 낸 전 씨는 책에서 “육영수는 심리적 고아였던 박정희에게 새로운 인식을 제공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는 육 여사가 순종적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박정희가 육 여사에게 의존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1954년 6월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귀국하던 박정희 당시 준장은 배 위에서 이런 일기를 쓰기도 했다.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이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 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한편, 육 여사의 사망은 당장 민청학련 관계자들에게는 한줄기 숨통이 트이는 계기를 마련한다.

박 대통령이 육 여사 서거 8일 만인 8월 23일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하는 유화 조치인 긴급조치 5호를 단행하기 때문이다. 인혁당 관계자들 이외엔 민청학련 관계자들에게 사형은 무기로, 무기는 20년으로 감형한다.

김지하를 비롯해 관련자들이 항소를 집단적으로 포기하면서 형이 확정되어 이감되기 시작했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김지하는 영등포 교도소로 이감됐다. 머리를 박박 깎이고 먹방에 배정됐다.

먹방이란 글자 그대로 먹물을 뿌린 듯 사방이 새카만 방이다. 0.78평으로 밥그릇 들어오는 식구(食口)통만 열려 있는 폐쇄된 방, 이른바 징벌방이었다. 그의 말에서는 당시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전해져 온다.

“하루 온종일 식구통만 바라보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식구통만 늘 열려 있어 새카만 속에서 네모난 하얀 외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개방된 장소에서 여러 사람이 집단적으로 노동하는 징역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데 먹방처럼 특수하게 감금된 상태에서 오래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면 현실적 평형감각이 사라진다. 현재가 무지 괴롭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환상으로 고통을 보상받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에 오로지 추억, 과거 쪽으로만 생각이 기울어진다. 과거를 자꾸 되풀이해 기억해냄으로써 현재의 고통, 감각, 통증을 자꾸 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오래되면 현실감각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먹방 생활을 견디려면 나와의 싸움, 과거와의 싸움, 추억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 과정은 매우 집요하고 처절하다. 통증을 통증대로 인정하면서 고통 자체를 대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이것만이 자기를 파괴하지 않고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거다.”

그 무렵 처음으로 가족 접견이 허락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아내였다. 아내는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별다른 말이 없이 울기만 하니 그게 더 가슴이 아팠다. 세상에 나온 맏아들 얼굴도 그때 처음 제대로 보았다. 재판 때 잠든 모습을 한 번 보고 교도소에서 본 게 두 번째였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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