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헌법 국민투표… 부결되면 대통령직 사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7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70>땅굴

중동부전선 철원 부근에서 발견된 제2땅굴. 땅굴에 장치해 놓은 폭약까지 발견됐다. 동아일보DB
중동부전선 철원 부근에서 발견된 제2땅굴. 땅굴에 장치해 놓은 폭약까지 발견됐다. 동아일보DB
1974년 8월 육영수 여사 서거로 온 국민이 경악과 비통에 빠진 가운데 석 달 뒤인 11월 15일에는 국민을 다시 충격에 빠뜨리는 일이 생긴다. 바로 북한의 ‘땅굴 발견’이었다. 땅굴은 경기 연천군 고랑포 부근 비무장지대 안에서 북한군이 남쪽으로 파 내려온 지하터널 형태로 파져 있었다. 길이도 중앙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1km나 내려와 있었고 콘크리트로 굳게 다져져 있었다.

국가원수의 목숨까지 노리고 결국 대통령 부인을 쏴 죽이는 북한의 도발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국민들에게 땅굴의 발견은 ‘남침 야욕’이나 ‘도발’의 의미를 넘어선 ‘침략’과 ‘기습’으로 느껴질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다음은 동아일보 11월 18일자 보도다.

‘땅굴은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1.1km까지 폭 1m 높이 1.33m 콘크리트 슬래브로 단단히 구축되어 220V 전선에 60W 전등까지 달리고 수레차가 다닐 수 있도록 좁은 궤도까지 가설돼 있었다. 900m만 더 파면 바로 비무장지대 남방 한계선에 닿을 수 있어서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더라면 이 땅굴을 통해 수백 수천의 북괴 병력이 바로 남방 한계선을 넘어 침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군사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4개월 뒤인 이듬해 1975년 3월 20일에는 강원 철원군 동북방 13km 지점에서 ‘2차 땅굴’까지 발견된다. 지하 50m 화강암을 뚫고 내려와 대규모 병력 수송까지 가능할 정도여서 1차와는 비교가 안 되는 대규모 터널이었다. 이튿날 3월 21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1호 터널이 갱도의 폭 90cm 높이 120cm로 지하 약 46cm 지점에서 콘크리트 구조물 모습으로 발견된 데 비해 2호 터널은 폭 2m 높이 2m 지하 갱도가 험악한 중부전선 산악지대를 연결하며 지하 50∼160m의 암석층을 남북으로 꿰뚫었다. 터널의 계획된 길이는 약 3.5km로 군 당국 실험 결과 이 정도 규모면 시간당 구보 2만4000명, 속보 2만 명, 도보 1만8000명의 병력이 침투할 수 있으며 차량은 물론 일부 야포까지도 충분히 통행할 수 있다고 한다.’

더 놀라웠던 것은 북한이 이들 땅굴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기 전부터 파내려가기 시작했다는 것. 1차 땅굴 발견 즈음 북한에서 귀순해온 김부성 씨(35·노동당 연락부 7부 소속 전투원)와 유대윤 소위(29)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직접 땅굴 공사에 참여했었다. 현재 전 휴전선에 걸쳐 북괴군 군단별로 남침용 땅굴 공사가 진행 중이며 이는 1971년 9월 김일성의 지시로 시작됐다”고 밝혔다. 겉으로는 평화통일과 협력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남한 기습을 노렸다는 이야기였다. 국민들의 분노와 배반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박정희 대통령도 1, 2차 땅굴 발견 당시 일기에 놀라움과 격분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74년 11월 15일 맑음…오늘 아침 7시경 전방 고랑포 부근 DMZ 안에 북괴가 남으로 지하터널을 뚫어 나오다 우리 순찰대에 발각…북괴가 입으로는 평화 운운하면서 기실은 무력남침을 위해 이처럼 집요하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광적으로 날뛰는데, 아직도 태평성세에 사는 것처럼 착각하여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일부 인사들의 철없는 행위는 참으로 가탄(可嘆), 가탄!’

‘75년 3월 20일 오후부터 강우…어제 철원 북방 휴전선 안에서 북괴의 지하땅굴을 또다시 발견. 이런 판인데도 북한의 남침 야욕이 없다고 운운하는 이 나라 일부 정치인들의 그 무책임한 소리가 또 있을 것인가?…오, 신이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쪽에서는 땅굴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정권 내부의 신뢰도가 무너지고 있었다.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김성진의 회고(‘한국정치 100년을 말한다’)다.

‘명백한 북한 측 침략 의도가 확증으로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오히려 우리 정부가 꾸며낸 일이 아닌가 의심하는 외국 언론이 있었다. 나는 몹시 분통이 터졌다. 일부러 외신기자들을 불러와 보여주어도 그들은 그 터널이 북쪽에서부터 파 내려왔다는 사실을, 지면에 나타난 흔적으로 보고서 확인하고도 사실 그대로 보도하는 데 주저했다. 이유는 뻔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증폭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권력 남용의 방패로 삼은 일부 공무원들 때문에 민심도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인권유린 비난도 생겨났다.’

대다수 국민들이 안보 불안에 휩싸인 가운데에서도 반유신투쟁이 수그러들 줄 몰랐던 것도 그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1974년 한 해 동안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쫓기거나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사형 무기징역을 무더기로 선고받는 가운데 사람들은 좌절하고 비탄에 빠졌다. 민주진영으로서는 너무나 한꺼번에 재앙이 닥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탄압이 거셀수록 저항도 거센 법. ‘이대로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이 기도회로,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수호투쟁으로, 문학인 선언으로, 구속자가족협의회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그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것이 재야민주화운동 세력의 결집체라 할 수 있는 ‘민주회복국민회의’였다.

1차 땅굴이 발견된 지 2주일도 안 된 1974년 11월 27일 종교계 학계 정계 언론계 법조계 각계 인사 71명은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국민선언’을 발표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을 공표한다. 윤보선 함석헌 김재준 등이 서명한 국민선언은 ①현행 헌법을 합리적 절차를 거쳐 민주헌법으로 대체하고 ②복역 구속 연금 중인 모든 인사를 석방하고 언론자유를 보장하라는 등의 6개항을 천명했다. 국민회의는 이듬해 3월 초까지 7개의 시도지부 20여 개가 결성될 정도로 호응을 얻었다. 정부도 가만있지 않았다.

선언대회를 치른 사흘 뒤인 11월 30일 국민선언문에 서명한 경기공업전문대 김병걸 교수가 학교에서 권고사직을 당했고 같이 서명한 안병무 문동환 박봉랑 서남동 이우정 교수 등에게도 경고조치가 내려졌다. 12월 9일에는 서명에 참여 했던 서울대 백낙청 교수까지 징계 파면된다. 김병걸 교수의 복직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고 백 교수는 1970년대 내내 해직교수로 지내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복직한다. 이듬해 1975년 1월 17일엔 국민회의 대표위원 중 한 사람이던 이병린 변호사(당시 63세)가 구속되고 3월 22일에는 운영위원인 한승헌 변호사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박정희 대통령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것일까. 1975년 벽두인 1월 22일 오전 10시 돌연,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하겠다면서 부결되면 물러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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