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돌연한 유신헌법 찬반투표 안은 재야는 물론이고 1974년 하반기 야당인 신민당의 움직임에 영향받은 바 컸다.
육영수 여사 서거 일주일 뒤인 8월 22일 서울 명동 예술극장에서는 4월 28일 결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유진산 총재 이후 당권을 겨루는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는 유신 치하에서 무능력한 ‘불임(不姙)’ 야당 이미지를 벗고 진정한 야당으로 키우겠다는 선명성 경쟁이 불이 붙었다. 당시 학원 종교계 재야의 반유신 입김이 신민당에 거센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승자는 김영삼이었다. 최연소(47세) 야당 총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선명 야당을 내걸고 당권을 차지한 그가 제일 먼저 뛰어든 일은 유신헌법 개헌 투쟁이었다. 11월에는 ‘개헌 대강(大綱)’을 마련했으며 “개헌 추진 원외투쟁도 하겠다”고 나섰다.
74년 말까지만 해도 수출의 날(11월 30일), 검사장 회의(12월 13일) 등에서 쉴 새 없이 “유신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불퇴전의 의지를 밝혔던 박 대통령은 75년으로 접어들면서 입장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새해 벽두부터 김영삼 총재가 개헌 추진 지부 현판식을 다니며 바람을 일으키자 김종필 국무총리가 나선다. ‘남산의 부장들’(김충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김종필은 정면 돌파밖에 길이 없다고 박 대통령에게 은밀히 건의했다. “드골처럼 국민투표를 해서 국민들이 유신체제가 나쁘다고 하면 고쳐야지요. 그러나 우리가 투표하면 이깁니다.” “총리가 그런 식으로 물러서니 이 놈 저 놈 다 덤비는 거야.” JP는 박 대통령이 겉으로는 그렇게 펄쩍 뛰면서도 뭔가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이 말했다.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 국민투표에서 지지가 안 나오면 내가 그만두지.”…청와대 비서실과 정보부는 국민투표 완승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1월 22일 “반대가 많아 투표에서 지면 하야(下野)하겠다”는 대통령의 특별담화와 함께 국민투표일이 2월 12일로 공고됐다. 불과 20일 뒤였으니 전광석화 같은 작전 수행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미국을 방문 중이던 김영삼 총재는 ‘대통령의 기습’에 깜짝 놀라 서둘러 귀국한다. 김 총재는 대통령의 발표가 투표 형식을 빌려 모처럼 달아오르고 있던 개헌 열기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작전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현지에서 성명을 내고 “기만적인 정치 쇼다. 신민당의 당력을 집결해 투표 거부운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귀국 중에 잠깐 들른 일본 도쿄에서까지 “귀국 즉시 대통령을 만나 투표 중지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김대중도 김영삼과 긴급 회동하고 공동회견을 통해 국민투표 거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비롯한 14개 단체도 투표거부 공동성명을 내자 ‘투표 보이콧’ 운동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헌법에 대한 찬반토론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내무부는 투표 거부를 선동하는 행위를 엄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투표 이틀 전인 2월 10일에는 전국에 비상계엄령까지 내려졌다. 드디어 투표 당일인 2월 12일이 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이희호 여사와 함께 명동성당에 도착해 금식기도를 한 뒤 정각 9시 성당 안에 종이 울리자 “이번 투표 결과는 군부독재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견디지 못해 실시하는 것이며 미리 계획된 것을 발표할 것이므로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13일 정부는 유신헌법 찬반투표안이 79.8% 투표율에 73.1% 찬성으로 통과됐다고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신은 나에게 또다시 중책을 맡기시다. 신명을 다해 중책 완수에 헌신할 것을 서약하다.’
국민투표가 끝나고 3일 뒤인 2월 15일 박 대통령은 다시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민청학련 사건 및 기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던 민주인사 학생들을 일괄 석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2·15조치였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현행 헌법 질서의 역사적 당위성과 국민적 정당성이 주권자인 국민의 총의로 재확인된 이 시점에서 이들을 석방함으로써 이들에 대해서도 국민 총화를 더욱 굳게 다지며 민족 중흥의 역사적 과업 수행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이미 형이 확정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중 유인태 이현배 이강철 등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만 제외하고 대다수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다. 김지하도 2월 15일 김동길 박형규 등 56명과 함께 석방된다.
그가 풀려 나온 날, 서울 영등포 교도소 문 앞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의 모든 내외신이 집결해 있었다. 이미 한참 어둠이 내리고 영하의 온도가 기자들을 얼어붙게 한 밤 9시. 드디어 머리를 박박 깎인 김지하가 나오자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김지하는 곧장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 공중으로 높이 헹가래 쳐졌다. 그리고 그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질문들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소감은?”
“느낌은?”
“얼굴이 수척하다. 갑자기 밖으로 나온 느낌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현 정부에 대해서는?”
“유신철폐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고문을 당했는가?” “이번에 태어난 아들에 대해서는?”
“솔직한 지금 심경은?”
쏟아지는 질문 세례가 끝나자 김지하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쳤든지, 세월이 미쳤든지, 둘 다 미쳤든지 하여간 알 수 없다. 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10개월 만에 석방하는 건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누군가? 미친 쪽은. 이제부터 서서히 어둠 속에 갇혔던 잔혹한 사실들이 모두 다 터져 나올 것이다. 그 터져 나오는 순서에 따라 현 정권도 서서히 붕괴해가기 시작할 것이다.”
한편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 중에는 훗날 한국 문단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사람도 있었으니 바로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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