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밤 친이계(친이명박)계 좌장 격인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68·5선)은 서울 은평구 구산동 자택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 시간 전 이정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감사원 감사 결과가 사실이라면 국민을 속인 것”이라고 공식 발언을 하자 분노가 치민 것이다. 그날 밤 이재오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야∼, 청와대가 이렇게 나간다?” 그날 감사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대운하 중단 이후에도 운하 재추진을 염두에 두고 4대강 사업을 추진했다고 발표했다.
15일 오후 예고 없이 국회 의원회관으로 찾아가 만난 이재오는 다소 격앙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정권 2인자’ ‘왕의 남자’로 통했던 그는 “정권이 바뀐 이후 어떤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며 여러 차례 손사래를 쳤지만 4대강 문제에 대해선 포문을 열었다.
그는 “(이 수석의 발언을 거론하며) ‘사실이라면’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청와대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이정현의 말이 박근혜 대통령의 말 아니냐. 세상에 어떤 대통령이 ‘사실이라면’ 국민 기만이라고 하느냐”면서 “4대강 사업을 다른 당에서 한 것이냐”고 목청을 높였다.
“내가 국가정보원이 대선 때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여당에 유출하고 여당이 선거 전략을 쓴 것이 ‘사실이라면’ 부도덕한 행위이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것이 아니냐고 하면 (정치권이) 뒤집어질 것이다. 내가 ‘사실이라면’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해도 내가 피해갈 수가 있겠느냐.”
기자와 만나 속내를 털어놓던 이재오는 결국 17일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폭발했다.
그는 “감사원은 정치적 감사, 주문 감사, 맞춤형 감사를 하면 안 된다”면서 “발표할 때마다 감사 결과가 다르면 감사원장이 현장에 가봐야 하는데 그렇게 해보지도 않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은 여권 전반에 매우 부담을 준다. 감사원장 자진 사퇴는 정국 안정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국정원이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국회에 던지지 않았어도 여당이 슬기롭게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는데 그때부터 꼬였다”며 “정치적 혼란의 원인을 제거하려면 국정원장의 자진 사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를 향해서도 직격탄을 날렸다. 이재오는 “청와대가 정쟁의 중심에 서면 되겠느냐. 싸움은 청와대가 벌여놓고 여당은 청와대 설거지나 하고 뒤따라 다니며 야당과 싸우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사실 이재오는 일주일 전만 해도 속으론 부글부글하면서도 공식 반응을 자제했다. 4대강 감사 발표 다음 날인 11일 자신의 트위터에 ‘일묵여뢰(一默如雷·침묵은 우레와 같다)’라는 네 글자를 남긴 것이 전부였다. 불교 경전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말인데 현 정국에서 침묵하는 이유가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님을 시사하는 정도로 그의 불편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청와대에 전달한 것이었다.
이는 자신이 나설 경우 신·구 정권의 갈등, 친이와 친박 싸움으로 비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얘기하면 친이계 좌장이 드디어 (청와대와) 붙었다고 할 것 아니냐. 이재오가 정치적 영향력 확보 위해서 얘기한다는 인신공격, 모함 등을 할 것이 아니냐.”
4대강 문제로 폭발하긴 했지만 그는 당분간 ‘잊혀진 이재오’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주요 현안에 대해서도 가급적 공개 발언을 삼가겠다는 생각이다. 의원들과의 식사 일정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조심할 만큼 정치행위로 오해받을 행위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이는 청와대와 당 주류인 친박계에 독자적으로 맞설 세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는 현실적 여건도 감안한 것이다. 이재오는 “내가 위축될 것은 전혀 없다”고 얘기하지만 핵심 측근 의원들이 지난해 4월 총선 때 공천을 받지 못하고 추풍낙엽 처지가 되면서 정치적 세(勢)는 거의 사라졌다. 그는 공천 얘기가 나오자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정치를 하면서 잘못했다는 것 중 하나가 지난 총선 때 공천을 반납하지 않은 거다. 반납했으면 친이계가 모이면서 당이 깨지고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있었지. 하지만 정권 재창출을 방해했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인간’ 이재오로 봐서는 공천을 반납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고 이재오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그는 자신의 팬클럽을 재정비했다. ‘재오사랑’이란 명칭을 ‘함박웃음 좋은세상’으로 변경하고 소백산에서 산행대회를 가졌다. 한 측근은 “현재 팬클럽 멤버는 1만5000여 명이며 기존 조직을 정비해 심기일전하자는 취지로 새롭게 업그레이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매월 한 차례 ‘한나라 산악회’ 모임도 갖는다. 낙천한 전직 의원들과 산행을 하는데 40여 명이 꾸준히 모인다고 한다.
비주류 이재오가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을까. 일각에선 내년 6월 지방선거가 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이재오의 정치적 공간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측근은 “친이계라는 세력을 갖고 있는 이재오가 당분간 당내 비주류의 길을 걷다 보면 박 대통령과 자연스럽게 차별화가 이뤄지게 된다”면서 “중량감 있는 중진 정치인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이재오의 지금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암중모색”이라며 “국회의장은 전혀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재오는 기자에게 현행 5년 단임제를 분권형 4년 중임제로 바꾸는 개헌과 행정구역 개편에 대해 “나의 정치적 꿈이며 전부를 바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자 ‘킹메이커’였던 이재오의 말이기에 향후 정치적 행보와 맞물려 묘한 여운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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