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석방… 최고의 문학가 박경리 선생이 교도소 앞 마중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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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72>모성

정릉 집에서 손자를 업고 있는 작가 박경리를 김일주 씨가 찍은 것이다. 1982년 가을경이다. 동아일보DB
정릉 집에서 손자를 업고 있는 작가 박경리를 김일주 씨가 찍은 것이다. 1982년 가을경이다. 동아일보DB
‘(김지하가 풀려난) 1975년 2월 15일은 낮 최고 기온이 영하 7도였다. 며칠째 퍼붓던 눈이 멈추고, 날은 흐렸다. 흐린 날이 저물자 기온은 영하 12도 아래로 떨어졌다. 얼어붙은 거리에 북서풍이 불었고, 그날 밤 서울 영등포구 고척동 영등포 교도소 앞 거리에는 라면 껍질과 연탄재가 북서풍 속에서 회오리치면서 솟구치고 있었다.’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한 김훈은 75년 그날 교도소 정문 앞에서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의 경험은 산문집 ‘바다의 기별’(생각의 나무)에 수록돼 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김지하가 얼마나 당대 미디어로부터 주목받던 인물인지가 느껴진다.

‘교도소 앞에는 대낮부터 기자들이 몰려들었는데 교도소 쪽은 김지하의 석방 시간을 예고하지 않았다. 예고했다 하더라도 정치범의 석방 시간에 관한 약속을 법무 당국이 번번이 지키지 않았고,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출소자들은 새벽이나 심야에 교도소 뒷문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허다해 기자들은 하루 종일 교도소 문을 지키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나무토막이나 종이상자를 주워 모닥불을 때거나 인근 음식점에서 내다버린 구공탄 재에 남아 있는 불기 주변에 모여 언 발을 녹여가면서 교도소 정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문이 열려 김지하가 나올지 알 수 없어 저녁을 먹으러 갈 수도 없었다. 마감시간이 임박해오자 기자들 사이의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김훈의 눈에 띈 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장모 박경리였다. 그러나 박경리가 있던 곳은 교도소 정문이 아니라 교도소를 바라보고 멀찍이 선 언덕 위였다. 다시 김훈의 글이다.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쯤 아니었을까.…교도소 정문 맞은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저물어가는 교도소 정문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인네 옆에는 영업용 포니 택시가 한 대 정차해 있었는데, 그 여인네가 출소자를 마중하기 위하여 대절한 택시였다. 아마도 운전기사가 연료를 아끼느라고 택시 안의 히터를 꺼버린 모양이었다. 아이 업은 여인네는 자동차 밖에서 떨고 있었다. 그 여인네는 자꾸만 허리춤을 들어 올려 미끄러져 내리려는 아이를 등의 한복판 쪽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박경리가 맞는지 긴가민가 하던 김훈은 기자들의 무리를 떠나 여인네 쪽으로 접근했다. 가까이 가보니 과연 박경리 선생이었고 등에 업힌 아이는 김지하의 갓 태어난 아들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선생이 알아보지 못하게 위치를 잡은 김훈은 선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당대 최고의 문학가인 박 선생에게서 예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여성, 어머니로서의 질긴 모성의 힘을 느낀다.

‘그분은 담요로 만든 방한화에 버선을 신고 있었다. 발이 몹시 시려왔던지 이따금씩 방한화를 벗고 손으로 언 발을 주물렀다. 등에 업은 아이는 머리끝까지 온통 포대기로 감싸고 그 포대기 위를 다시 두꺼운 숄로 덮어서 아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그 여인네는 몸을 흔들어서 아이를 얼렀다.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그 여인네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인네가 그때 아이에게 한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답답했다. “울지 마라, 아비 곧 나온다.” 아마 이런 말이었을까. 그 여인네가 아기를 업은 포대기는 매우 낡아 있었다. 포대기는 누빈 포대기였는데 허리 부분을 넓게 접어서 아이의 등에 힘이 걸리게 바싹 조였으며 아이의 엉덩이 밑으로 포대기 끈을 여려 겹 둘렀다. 그래도 그 여인네의 야윈 몸으로부터 아이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이어서 여인네는 자꾸만 몸을 추슬러 아이를 끌어올렸다.…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돋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無名)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그런 풀포기의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런 그 여인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시대도, 긴급조치도, 국가보안법도, 무슨무슨 혐의도, 성명서들도, 군법회의도, 김지하도,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밤 9시. 교도소 문이 열리고 김지하가 나왔지만 그는 지지자들의 목말을 타고 ‘우린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사라졌다.

그제서야 박경리가 교도소 앞 사람들 속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사위때문이 아니라 백기완 때문이었다.

74년 1월 유신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수감된 백기완도 그날 나오기로 돼있었다. 하지만 김지하가 나오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기자들이 교도소에 물어보니 ‘긴급조치 위반 부분은 형 집행 정지가 되었으나, 6년 전에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어서 벌금 십만 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김훈이 전하는 현장 모습이다.

‘즉각 백기완 석방을 위한 모금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미 대부분의 기자와 학생들이 김지하를 뒤쫓아 빠져나간 다음이어서 영 신통치 않았다. 그때 사람들 속으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박경리 선생이었다. 선생은 어느새 언덕에서 내려와 교도소 정문 앞 광장에 있었다. 그분은 아이를 감싼 포대기의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러더니 가까이 있던 웬 대학생을 불렀다. “학생, 이 돈을 좀 보태시오”라고, 다만 그렇게 그분은 말했다. 그러고는 대절해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 안에서 등에 업었던 아이를 풀어서 무릎 위에서 재우고 있었다. 시간은 밤 열두 시에 임박하고 있었다.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놓고 그분은 다만 잠든 어린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분을 뒤쫓아 가는 사람은 없었다.…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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