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청와대가 임기 말 ‘이지원(e-知園)’에 자료를 대폭 삭제할 수 있는 기능을 설치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이 기능을 통해 삭제됐을지 여부가 쟁점으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2008년 1월 구축된 새로운 이지원에선 ‘대통령일정’ 가운데 ‘일지’와 ‘주제’를 삭제할 수 있도록 돼 있어 회의록 외에 다른 주요 문건도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어떤 항목 삭제할 수 있게 됐나
2007년 7월 청와대가 한국정보화진흥원에 보낸 ‘이지원 기록물보호체계 구축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청와대는 “참여정부에서 생산된 기록물을 누락 없이 차기 청와대로 인수인계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기록물보호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사업 추진 이유를 설명했다. 또 “대통령기록물의 효율적 관리를 통해 국정운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시스템의 설계 과정에는 오히려 생산된 문서를 삭제하고 초기화하는 기능이 대거 포함됐다. 이는 해당 사업계획서에 포함된 ‘준공기능점수 세부내역’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청와대는 시스템 구축 예산을 산정하기 위해 이 자료를 작성했다.
이지원 내부 자료 가운데 ‘대통령 일정’ 분야의 ‘일지’ ‘주제’ 항목 등이 삭제 대상에 포함됐다. 또 업무편람 분야에서 ‘업무처리방법 지시사항’, 과제관리 분야에서 ‘과제관리체계 이력’ 등도 삭제 대상에 들어갔다. 온라인 보고 분야에서는 ‘시행경로 초기화’ 기능이 추가됐다. 이 밖에 정책품질관리 분야에서 ‘추진 내용’을, 업무자료 인수인계 분야에서도 ‘개인 간 인수인계서’와 ‘처리한 문서’ 등을 모두 삭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총 53개 항목에 대한 삭제 및 초기화 기능이 추가됐다.
2008년 10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이범래 전 새누리당 의원이 이런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전 의원은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2007년 4월부터 시행됐는데 노무현 정부 청와대가 이후에 문서를 삭제하는 기능을 도입한 것은 명백한 법률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대통령기록물을 파기할 때 대통령기록관리전문위원회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만약 이 규정을 어기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 삭제 기능 왜 도입했나?
노무현 정부가 이지원에 삭제 기능을 대거 추가한 이유도 주목된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직후 청와대에선 “기존 업무관리 시스템에 남아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당시 한 관계자는 “청와대에 들어와 인수인계 받은 것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위기대응 매뉴얼’ 책 한 권 정도였다”고 전하기도 했다. 반면 노 전 대통령 측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이 당선인 측에 인사파일 제공 의사를 타진했으나 거절했다”고 맞섰다.
새누리당에서는 민감한 주요 문서를 이명박 정부에 넘기지 않기 위해서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정권교체로 들어선 새 정부에 대통령의 일정이나 계획, 인물정보 등 업무자료를 고스란히 넘겨줄 필요가 없었다는 취지다. 다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부 인수인계 과정에서 복잡한 업무처리 서류를 남겨두는 것보다 시스템을 초기화하고 불필요한 자료를 삭제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나온다.
SI 업계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특정 인트라넷 사이트에 들어 있는 내용은 서버 관리권한을 이용해 삭제할 수 있지만 인트라넷 내부 삭제 기능을 도입하면 이를 통해 문서를 삭제하는 것은 더 쉽다”고 설명했다. 서버에서 지우는 것은 흔적이 강하게 남지만 인트라넷 내부에서 수시로 지울 수 있게 하면 이런 흔적도 가릴 수 있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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