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인혁당 조작 사건’ 동아일보에 폭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2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73>인혁당

출옥 직후 찾아온 김지하에게 위스키를 따라주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동아일보DB
출옥 직후 찾아온 김지하에게 위스키를 따라주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동아일보DB
김지하는 출옥 직후 제일 먼저 천주교 서울교구청 김수환 추기경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말이다.

“방에 들어서자 추기경께서 한 잔의 위스키를 주셨다. 그것을 마시니 머리 속과 온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한결 개운해졌다.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가라앉히지 않으면 실수할 것 같아서 인사만 드리고 재빨리 정릉에 있는 처가로 돌아갔다.”

그의 말을 들으며 기자는 칼날처럼 서슬 퍼런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김지하에게 위스키를 권했던 추기경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듯했다.

김지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날 며칠을 까무러친 것처럼, 마치 죽은 듯이 내리 잠만 잤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따뜻함, 아내, 장모, 그리고 아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비록 몸은 풀렸으나 그의 내면은 행복하지 않았다. 다름 아닌 인혁당(인민혁명당) 때문이었다.

그가 풀려나오고 두 달이 채 안 된 75년 4월 9일 인혁당 사건으로 8명에게 사형이 집행된다.

피고들은 전날 대법원 판결에 따라 재심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재판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훗날 인혁당 사형집행은 유신정권 당시 정치권력에 종속된 수사 기관의 불법과 사법부의 굴종이 빚어낸 대표적 ‘사법 살인’으로 꼽힌다.

느닷없는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몰려온 가족들은 모두들 넋이 빠진 사람들처럼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시신들은 각각 시차를 두고 한 구씩 인도되었다. 집이 지방에 있는 가족들은 미사라도 드리고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했으나 이마저도 거부됐다. 8구의 시신을 각각 경찰들이 설정한 장지로 견인해갔다.

인혁당 사건은 발생시기에 따라 1차(1964년)와 2차 재건위 사건(1974년)으로 나뉜다.

1차 사건은 한일회담과 대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가 거셌던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제1차 인혁당 사건’. 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적발해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1월 20일 1심에선 기소된 13명 가운데 2명은 징역형, 다른 11명은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5개월여 뒤인 1965년 6월 29일 2심은 전원에 대해 유죄 판결했고, 9월 21일 대법원은 항소심 형량을 확정했다.

2차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꼭 10년 뒤인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사건이다. 민청학련 주동자들이 1969년 이래 남한에서 지하 조직으로 암약한 인혁당과 연계를 맺어왔고 궁극적으로 공산 혁명을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8명에 대해 사형이, 15명에 대해 징역 15년에서 무기징역이 떨어졌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03년에 낸 ‘기억과 전망’ 봄호에 실린 ‘인민혁명당 사건을 통해서 본 인권의 문제’라는 제목의 글에는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기술되어 있다.

‘고문은 주로 중정 6국 지하실에서 이뤄졌다. 수사관들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일삼았고, 지하실 사무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몽둥이질을 했으며, 피의자들에게 일주일 이상 잠을 안 재우기도 했다. 하재완은 폐농양증에 걸려 입에서 피를 토했고, 장이 항문으로 빠져나와 똑바로 앉거나 걷지 못했다. 박중기는 전기고문을 받는 도중 실신했다. 이수병은 소나 돼지도 그렇게 맞으면 죽을 정도로 몽둥이질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피의자들 대부분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반 실신되는 경험을 했고, 몽둥이질 후유증으로 부축을 받으면서야 겨우 계단을 올라 다닐 수 있었다. 서울구치소 안에서도 철장을 붙잡고 몸을 뒤척이면서 겨우 교도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남편과 아빠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수감되자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모, 형제, 부인들은 시장 목욕탕까지 따라다니는 경찰들의 철저한 감시와 미행을 받았다. 이웃들에게 ‘빨갱이 가족’으로 찍힌 어린 자녀들은 학교 친구와 선생님에게 왕따를 당했다. 이사를 가도 경찰들이 ‘빨갱이가 이사를 왔다’고 이웃에 소문을 내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했다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2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등을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해 2007, 2008년 모두 법원으로부터 “유신정권 때 불법 행위로 인한 희생자들”이라며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의 선고에 국가가 항소하지 않아 선고 8일 뒤 모두 무죄가 확정됐다.

그런데 당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데에 결정적 증언을 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김지하다.

김지하는 감옥에서 인혁당 관계자들을 우연히 만나 “사건이 조작됐으며 그 과정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듣는다. 그리하여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수감 된 뒤 출감하자마자 1975년 2월 25일자부터 27일자 동아일보에 ‘苦行(고행)… 1974’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글을 연재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다시 감옥에 끌려 들어가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기자는 그에게 “그 힘든 감옥생활이 끝난 지 바로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어떻게 다시 글을 쓸 용기가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감옥에서 인혁당이 조작됐다는 것을 안 이상 어떻게 가만있을 수가 있겠나.”

‘고행’에 실은 시는 당시 이런 그의 심경이 잘 나와 있다. 육신은 비록 해방되었으나 넋은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 그게 김지하의 내면이었다.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건너편 옥사 철창 너머에 녹슨
시뻘건 어둠
어둠 속에 웅크린 부릅뜬 두 눈
아 저 침묵이 부른다
(중략)
철창에 걸린 피 묻은
낡은 속옷이,
숱한 밤 지하실의
몸부림치던 하얀 넋
찢어진 육신의 모든 외침이,
(중략)
내 피를 부른다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어둠 속에서
잿빛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날
저 시뻘건 시뻘건 육신의 어둠 속에서
부릅뜬 저 두 눈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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