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용 교도관이 들고 나온 문건들은 그날로 김지하 측근들에게 넘겨졌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조영래가 문건을 건네받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조영래의 손이 닿은 원고가 다시 김지하 손에 들어가면 김지하가 이를 다시 검토해 되돌려 보내는 식이었다.
다시 전 교도관의 회고다.
‘나중에 발각될 것을 대비해 종이와 필기구 출처를 확실히 해놓는 일은 김지하 옆방에 수감되어 있던 한 학생이 동의해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국사범이나 요시찰인에 한해 항소이유서 등을 방 안에서 작성하도록 했는데 그 과정에서 교도관들이 종이와 연필 등을 주었다가 회수하곤 했다. 나는 그 학생이 쓰다 남은 종이와 연필을 김지하에게 전했다.’
양심선언을 바깥으로 반출하는 일도 큰일이었지만 세상에 공개되었을 경우 작성과 유출 경로를 어떻게 밝힐 것인지, 이른바 알리바이를 허위로 만드는 일도 중요했다. 그래야 피해자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교도관이 궁리 끝에 꾀를 냈다. 마침 김지하가 수감되어 있던 사동의 청소(소제)를 담당하고 있던 소년수 한 명이 만기 출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제’라는 것은 행형 성적이 우수하거나 만기 출소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재소자 중에서 선발하는데 각 사동의 청소나 기타 잡일을 시키면서 얼마간 자유로운 구금 생활을 허용해 주는, 말하자면 수감자 중에서 선발된 자치대원의 일종이었다.
전 교도관이 눈여겨본 그 소년수도 착실하고 순박해서 여러 사람의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 소년수에게 양심선언 최종본을 맡겨 만기 출소하는 날 내보내기로 한다. 물론 소년수는 이 문건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말이다. 이러다 보니 김지하 양심선언 반출일은 소년수의 만기 출소일인 1975년 5월 22일로 잡혔다.
이렇게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전 교도관이 출근길 구치소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김지하 모친이었다. 전 교도관은 아들의 면회를 다니던 모친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모친은 전 교도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내가 어떤 사람을 찾아가 의논해 봤는데 그분 말이 양심선언을 하면 오히려 화를 입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거야.”
자식 걱정 때문에 애를 끓고 있는 어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다시 전 교도관의 회고다.
‘우리도 그런 걱정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입장이라는 것이 어디 그럴 것인가. 당시 모친은 외아들이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에서 갖은 고초를 함께 겪으며 아들 옥바라지를 위해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모친께 확실한 대답을 드리지 못하고 헤어지고 난 후 그 문제를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김지하 본인이 결단을 내리고 추진하는 일이니만큼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5월 22일이 왔다.
김지하가 미리 전 교도관에게 소개받은 소년수를 불러 종이 뭉치를 쥐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집에 보내는 안부편지이니 밖으로 나가거든 명동성당으로 가서 윤형중 신부라는 사람을 찾아 전해 달라.”
사실 양심선언문은 이미 며칠 전에 완성을 끝내고 발표 시점만 기다리고 있었기에 당시 김지하가 전해준 종치 뭉치는 사실은 빈 뭉치였다. 어떻든 영문을 모르는 소년수는 종이 뭉치를 품속에 갈무리해 서울구치소 정문을 통과했다.
공개는 8월에 일본에서 이뤄진다. 조영래 등에 의해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된 문건을 8월 4일 ‘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 소마 노부오 주교가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표한 것이다. 소마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양심선언은 금년 5월에 쓰여 만기 출감자를 통해 서울 명동대성당의 윤형중 신부님께 전해졌습니다. 그것이 윤 신부님을 방문한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미국의 시노트 신부님께 원문이 전달되었고 시노트 신부님으로부터 그 사본이 7월 상순 일본 ‘가톨릭 정의와 평화 협의회’에 송부되어 가급적 빠른 시일에 전 세계에 일제히 공표하여 달라는 의뢰가 온 것 입니다.”
김지하의 옥중 양심선언은 곧 주요 외신으로 타전됐다.
당시 공개된 양심선언문 전문은 김지하의 책 ‘남조선과 뱃노래’에 수록되어 있다. 김지하는 1985년 책을 통해 선언문을 재공개하며 “오늘 이 글이 재출간되는 것을 계기로 해서 분명히 밝혀두건대 일부에서 마치 내가 쓴 글인 양 주장하는데 나 혼자 쓴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나와 고(故) 조영래 씨의 글이다. 내가 감옥 안에서 중요한 ‘스킴(scheme·계획)’을 다 작성했고 조영래 씨가 풀어서 쓴 것이 바로 이 글”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로 시작하는 글은 본문과 추신, ‘사제단 신부님들께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책에 수록된 쪽수만 24쪽인 매우 긴 글이다. 김지하는 글에서 ‘내가 공산주의자인가’ ‘민주주의와 혁명과 폭력에 관하여’ ‘혁명적 종교에의 꿈-‘장일담’의 세계’ ‘나는 반공법을 위반했는가’를 소제목으로 해 힘과 열정을 다해 자신을 변호한다.
그의 양심선언문은 훗날 문학적 가치를 평가받는데 이는 개인적 한을 풀기 위한 항변이라기보다 독재에 대한 지성의 항의요, 탄압받고 있는 정치범들을 위한 집단적 변론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이다. 홍성우 변호사의 말이다(‘인권변론 한 시대’).
“한마디로 한 시대의 기념비적 명문이라 생각한다. 피고인의 절박한 사정이 절절히 들어 있고 거기다 해박한 지식과 감동을 자아내는 이끌림을 갖고 있다. 언제 읽어도 가슴이 뛰게 하는…. 그걸로 싸움은 일단 승부가 난 거나 마찬가지다 할 정도로 아주 쾌거였다. 선언문은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김지하 사건은 재판 기피 신청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가리는 재판이 일단 재항고까지 해서 대법원에서 다 기각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분위기도 반전되고 우리 쪽으로 주도권이 넘어왔다고 할 수 있었다. 일단 1975년 5월 분위기라는 예봉을 피하고 일방적 수세를 벗어나 시간을 벌면서 이제 재판 한번 붙자 이런 분위기가 되어 갔던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