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지식인들, 김지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9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78>환각

수배 시절 한 사찰에서 찍은 사진이다. 대나무를 쥔 모습에서 결기가 느껴진다. 김지하 제공
수배 시절 한 사찰에서 찍은 사진이다. 대나무를 쥔 모습에서 결기가 느껴진다. 김지하 제공
서울구치소에서는 대대적인 색출작전이 벌어졌다. 구치소 내 거의 모든 교도관이 정보부로 끌려갔다. 다시 전병용 교도관의 회고다.

‘예상했던 대로 정보부에서는 양심선언 반출 경위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아무것도 눈치 채지는 못했다. 그들은 사건 경위를 우리가 짜놓은 각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고 누구에게도 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그 일로 인해 (감시를 소홀히 했다며) 동료 교도관들이 파면되고 좌천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도 미안하고도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선언문 반출 심부름을 맡았던 소년수도 정보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긴 했지만 “편지 뭉치 같은 것을 김지하가 갖다 주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뿐”이라는 말에 정보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보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다시 구치소로 돌아온 김지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감시에 놓인다. 그는 바로 얼마 전까지 문세광이 갇혔던 독방으로 옮겨져 수감됐다. 그가 있던 층의 모든 방은 비워졌다. 다른 사람과 ‘통방’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접견과 물건 차입도 일절 금지됐다. TV 카메라까지 설치돼 24시간 행동을 감시당했다. 심지어 ‘종이’라고 생긴 것들은 어떤 것이든 공급이 중단됐다. 용변에 쓸 화장지조차 반입이 금지됐다. 박정희 정권의 모진 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김지하는 24시간 불이 켜진, ‘절대 침묵’의 방에서 사방으로부터 감시를 받으며 지옥 같은 시간을 경험해야 했다. 무려 일 년 반 넘게 성경을 비롯해 모든 ‘종이’가 금지됐고 접견도 금지, 통방도 금지, 운동도 금지, 금지였다. 김지하는 결국 공상만으로 시간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다.

“낮 시간에는 3부로 나눠 시간을 죽였다. 1부는 아침부터 열두 시까지 ‘민족통일 문제 구상’, 2부는 열두 시부터 네 시까지 20대에 ‘청맥’ 부탁으로 쓰려다가 중단한 동학혁명 서사시를 구상하고 잊기 쉬운 뼈대들을 나만 아는 암호로 흰 벽 위에 젓가락을 갈아 만든 대꼬챙이로 긁어서 표시하는 집필 시간으로 보냈다. 그리고 3부는 저녁밥 먹고 나서 취침 때까지 서정시와 현대 한국의 ‘반골열전(反骨列傳)’을 머릿속으로 쓰거나, 아니면 추억하거나, 아니면 비판하거나, 아니면 그냥 멍청히 앉아 있거나, 아니면 귀를 기울여 창밖에서 오가는 도둑님들 통방 내용으로 미루어 도둑님들의 삶에 관한 내 스타일의 서사시를 구상하거나, 아니면 그것도 하지 않거나…. 뭐, 그랬다. 이것들이 나의 근 일 년 반 동안 대강의 일과였다.”

그가 환각을 경험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어느 날 꿈에는 박정희를 만났다. 그가 배를 타고 멀리 도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사람이 칼을 던져 돛 줄을 끊어버렸다. 배는 돛들이 제멋대로 놀며 뱅뱅뱅 돌다가 마침내 구름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감방문 바로 위에는 텔레비전 모니터가 달려 있고 문 바로 옆에는 흰 벽이 깎이고 그 안에 아마도 녹음기로 보이는 무슨 시커먼 기계가 하나 들어앉아 있었다…. 문세광이 있던 방이라서 그랬을까. 한번은 일본 적군파에 속하는 키가 후리후리한, 검은 옷과 검은 복면의 닌자 두 명이 창살 사이로 슬며시 들어오더니 나를 프랑스로 데려가겠다고 말하는 환각도 나타났다. 또 그 다음 어느 날 한밤중에는 노 젓는 소리가 내내 들려와 창살 밖으로 내다봤더니 ‘보물섬’에 나오는 외다리 선장 실버가 조각배에 술과 담배를 잔뜩 싣고 창문가에 다가와 배를 대는 것이 아닌가! 우선 반가워서 술 한 모금에 담배 한 대를 맛있게 먹고 나서 가만 생각하니 이것은 체통 문제라 실버에게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극구 사정하여 보낸 일도 있었다.”

이런 환각은 대체로 밤에 일어났다.

그는 안에서 이토록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바깥에서는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1975년 6월 29일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터스 특별상’을 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하면서 ‘김지하 석방요구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구명운동이 이어졌다. ‘김지하의 사상과 신앙을 보증한다’는 성명서에 독일의 신학자 요한 메츠와 위르겐 몰트만을 비롯한 제3세계 15개국의 신학자들과 사르트르, 보부아르, 촘스키, 카를 라너, 하버마스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오다 마코토, 와다 하루키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서명했다.

마침내 김지하는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작가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1975년도 노벨 문학상, 노벨 평화상 후보로까지 추천된다. 이와 관련해 박정희 정권 때 스웨덴 대사관 해외공보관으로 일했던 최규장은 책 ‘언론인의 사계’(을유문화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은밀한 미션이 떨어져 있었다. 담시 오적을 쓴 김지하 시인의 노벨상 추천을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쳇, 노벨상을 타면 겨레의 영광인데 로비는 못할망정 저지는 또 무슨 저지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긴 해도 그를 세계적인 시인으로 만드는 것은 시인 자신이 아니라 박정희가 아닌가 싶었다.’

양심선언이 발표되면서 재판은 맥이 빠졌고 재판부도 김지하가 세계적인 인물로 주목받자 난처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재판은 지체되고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1심 구속기간이 만료되자 재판부는 형 집행정지를 결정했다가 다시 이를 취소하는 형식으로 그를 재수감하는 편법을 쓴다.

그때 서른넷이던 1975년 3월에 다시 감옥에 들어간 김지하는 서른아홉이던 1980년 12월 11일에야 풀려난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30대 청년 시절을 감옥에서 ‘지옥’ 같은 구금 생활로 보낸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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