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美대통령 “주한미군 철수”… 한미안보 최대위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7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85>한미갈등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1977년 미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동아일보DB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1977년 미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동아일보DB
1976년 말 김지하에 대해 ‘징역 7년’이라는 법원의 최종 선고가 내려지고 본격적으로 그가 감옥생활을 보낸 77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79년까지는 독자들도 주지하다시피 긴급조치 9호가 지배했던 시대였다. ‘긴조 시대’가 장기화되면서 한국 사회에는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이 쌓여갔다. 민심은 서서히 강한 비판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기에 중앙정보부와 경호실로 대표되는 정권 내부 권력투쟁과 ‘불통’은 심해져 갔다.

유신체제의 위기는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1977년 120명이던 정치적 양심수는 1979년 1239명으로 급증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이전 민주화 시위가 대학생이나 지식인 중심이었다면 77년부터는 여공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농민 같은 기층 민중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일방직 여공 똥물투척사건이나 함평 고구마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제는 외형적으로 10%가 넘는 대호황을 기록했지만 살인적인 물가고와 오일쇼크에 따른 충격파는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중산층을 붕괴시켜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이제 ‘김지하와 그의 시대’를 마무리할 시점이 가까워오고 있다. 기자는 이 대목에서 김지하가 박 대통령 서거소식을 감옥에서 전해 듣는 79년 10월 이전까지 유신체제의 마지막 과정을 대형사건 위주로 거시적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우선 짚어야 할 것이 70년대 후반 두드러졌던 미국의 압박이다.

김지하가 최종 선고를 받기 두 달 전인 76년 11월 3일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던 지미 카터가 당선되었다. 미 대선은 외적으로는 베트남전쟁 패배와 국가재정 악화, 내적으로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 후유증으로 진실성과 도덕성이 이슈로 등장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카터는 도덕성 회복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며 현직 대통령으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제럴드 포드에게 미세한 차이로 승리했다. 카터는 또 ‘인권 외교’를 전면에 내세우며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박정희 정부는 워싱턴 정가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던 카터의 당선 가능성을 낮게 봤다. 설사 당선된다 해도 주한미군 철수가 현실화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는 현실이 됐다.

카터는 77년 1월 26일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국가안보회의 내 정책검토위원회에 주한미군 병력 삭감 문제를 3월 7일까지 검토 완료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5월 5일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점진적 철수’ 의견을 낸 다수 참석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즉각 철수를 공식 확정한다. 그는 왜 이처럼 철수정책에 단호했을까?

박정희 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김성진은 ‘한국 정치 100년을 말한다’에서 이렇게 추정한다.

“카터는 한마디로 ‘정치에서의 목사(牧師)’ 역할을 자임했다. 이런 그로서는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월남전의 재판(再版)을 피하고 군비 절감을 한다는 정책구상에 인권문제를 결합시킨다는 착상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게다가 기존 미국 정치를 부정(不淨)한 것으로 보고 있었던 그에게 (철수는) 정치 목사로서의 정의구현이라는 책무를 완수한다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갖게 했을 것이다.’

카터는 실제로도 독실한 침례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어떻든 ‘인권’을 중시하는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자 미국 내 언론과 의회에서도 한국의 인권 시비가 자주 다루어졌다. 이미 카터 정부 출범 직전인 76년 9월 15일에 상원의원 맥거번은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는 사기극이었으며 박 대통령은 북의 위협을 국내 정치 억압에 이용하고 개인 권력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해왔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아예 박 대통령을 “악명 높은 폭군에다 (한국 내) 유일한 판사이자 결정권자”라면서 “(미 정부가) 군사 원조와 신무기 제공으로 남한의 북한 침략 계획에 휘말려 들고 있다. 주한미군은 박 정권의 인질이 아니다”라고 몰아붙였다.

바로 이어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도 프레이저 의원이 낸 ‘3·1 민주구국선언사건’ 피고인 윤보선, 김대중 등에 대한 형량 경감을 요구하는 대한(對韓)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10월에 접어들어서는 미국 정치계를 뒤집어 놓은 ‘코리아게이트’가 터진다. 76년 10월 25일자 워싱턴포스트지에 ‘한국인 실업가 박동선과 정보부 기관원들이 미 의회 의원들의 한국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의원들에게 매년 50만∼100만 달러를 뇌물로 주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건의 배후에는 한국의 박 대통령이 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미 언론들은 닉슨 정권하 불법 도청 사건이었던 ‘워터게이트’에 빗대 ‘코리아게이트’라 이름 붙였다. 코리아게이트는 2년 6개월을 끌다가 양국 정부가 공동성명까지 발표하는 우여곡절 끝에 1979년 중반에 가서야 겨우 봉합을 했다. 그러나 한미 간의 신뢰관계는 치명적으로 깨졌다.

코리아게이트가 터지고 한 달 뒤인 76년 11월 24일에는 미국 주재 중앙정보부원 김상근(주미대사관 참사관)이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는 미국 내 한국 정보부원 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미 정부에 공개했다.

이 일로 76년 12월 4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해임되고 후임에 건설부 장관이던 김재규가 임명된다. 3년 뒤 박 대통령을 권총으로 시해한 바로 그 김재규가 이때 정보부장이 되는 것이다.

77년으로 접어들면서는 또 다른 뇌관이 터지니 ‘김형욱 사건’이었다. 73년 미국으로 소리없이 망명한 김 전 중앙정보부장은 망명 4년 2개월 만인 77년 6월 22일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지시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따위의 그의 증언들은 미국 내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반대여론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한미갈등이 최고점으로 치닫자 북한의 김일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카터가 취임하자마자 외무장관 허담 명의로 파키스탄 미 대사관을 통해 국무장관 밴스에게 “한국을 빼고 미-북 간 직접 협상을 원하며 미국과의 대결을 원치 않는다”는 친서를 보냈다. 카터 역시 북한에 대한 여행 제한 규제를 풀고 미국과 남북한 간 3자 회담을 시도하는 등 대북 유화책을 펴나갔다.

이에 대한 박 대통령의 입장은 확고했다. “국내 실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나라 국정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아무리 경제적 어려움이 크더라도 일절 미 의회에 매달려 애걸복걸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미갈등의 골은 나날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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