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세의 장훙빙(張紅兵) 변호사는 7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발행되는 신징(新京)보와의 전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 어머니 팡중머우(方忠謀·당시 44세) 씨를 ‘반혁명 분자’로 군 당국에 고발했다. 팡 씨는 총살당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 자행된 숱한 패륜의 극단이었다.
당시 그는 16세의 홍위병이었다. 원래 이름인 장톄푸(張鐵夫)를 1966년 붉은 병사란 뜻의 훙빙으로 바꿀 정도로 골수분자였다. 1970년 2월 13일 안후이(安徽) 성 농촌마을에 있는 집에서 문화대혁명과 관련한 가족의 논쟁이 벌어졌다. 팡 씨는 “지도자(마오쩌둥)를 개인숭배해서는 안 된다. 류사오치(劉少奇) 편에 서겠다”고 말했다. 마오에 대한 비판은 당시엔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장 변호사는 “더이상 어머니가 아니라 인민의 적이었다”고 당시 심경을 토로했다. 장 변호사의 아버지도 “당신이 방금 쏟아낸 독설을 모두 글로 써라”고 요구했다. 그와 아버지는 군 당국에 팡 씨를 고발하며 이 글을 제출했다. 장 변호사는 “반혁명 현행범 팡중머우를 타도하자. 총살하자”라고 쓴 별도의 글도 제출했다. 그는 “현재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들이닥쳐 팡 씨를 폭행한 뒤 압송했고 두 달 뒤 총살했다. 이런 식으로 수십만 명이 처형됐다고 한다.
어머니가 숨진 뒤 후회가 몰려왔다. 장 변호사는 “수십 년간 반성을 멈춘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 ‘장훙빙, 장훙빙,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라고 되뇌곤 했다”며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극도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우울증도 생겼다. 남들과 대화할 때 어머니처럼 자신도 모르게 정치관을 드러낼까 두려웠다. 아버지가 숨질 때까지 부자는 이 사건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수없이 꿈에 나타났다. 그는 꿈속에서 “어머니, 불효자가 무릎 꿇고 사죄드립니다”라고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가 내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 변호사는 속죄의 길을 걸어왔다. 어머니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980년 7월 23일 안후이 성의 한 지방법원에서 팡 씨가 억울하게 처형됐다고 판결한다. 그 뒤 숨죽이며 살던 그가 이런 고백을 고민하기 시작한 때는 2009년이다. 인터넷에서 문화대혁명을 찬양하는 글을 본 뒤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 변호사는 “바진(巴金·1904∼2005·저명한 문학가)은 문화대혁명 박물관을 세워 구체적인 자료로, 가슴이 떨리고 혼이 나가는 충격적인 진실을 공개해 중국 땅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내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그가 2011년부터 팡 씨의 무덤을 문화재로 지정받으려는 활동을 펼쳐 온 것도 이 때문이다. 장 변호사는 “세상은 나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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